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왕의 장례미사의 도입부에는 매우 독특한 예식이 존재한다. 합스부르크 왕족의 관은 황실 묘지가 있는 카푸친 수도회 성당에 안치되는데, 이 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성당 밖에서 왕의 관을 들이려는 이들과 성당 안에 있는 카푸친 수도자들이 성당의 문을 사이에 두고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받는다.
“누가 들어오려고 하는가?”
“오토 폰 외스터라이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이시며, 웅가른, 뵈멘, 달마티엔, 크로아티엔, 슬라보니엔, 갈라치엔, 로드메리엔 그리고 일리리엔의 왕세자이시며 …… (그 외 수많은 공적 직책이 나열된다) …… 보이보디나, 제르비엔……의 보호자이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모른다!”
(운구자가 지팡이로 다시 성당 문 아래를 세 번 두드린다.)
“누가 들어오려고 하는가?”
“오토 폰 합스부르크 박사. 범유럽협회의 회장, 유럽의회 최고 의장이자 …… 훈장들의 소유자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모른다!”
(다시 지팡이로 성당 문 끝을 세 번 두드린다.)
“누가 들어오려고 하는가?”
“오토. 부질없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들어오라!”
살면서 수많은 직위와 훈장을 받고 유력한 인물이었을지라도 결국에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똑같은 죄인일 뿐이다. 진정 하느님의 안식에 들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함을 나타내는 예식이다. 왕실 관리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그는 아들이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높은 직위에 의존하면서 무난한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뒤, 그는 예수님께 의존해야 할 평범한 사람으로 거듭난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이 왕실 관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떤 표정, 어떤 모습,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아버지'
얼마나 걸었을까. 그의 종들은 서둘러 주인을 맞으러 나왔다. 집에서 주인을 기다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는 주인을 중간까지 나와 맞이한 것이다.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 있다고 말하였다(4,51).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4,52).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 있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4,53).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참됨을 증언하는 종들이 등장한다. 종들의 증언 역시 그리스어 원문에는 현재 시제(살아 있다)로 나타나 있다. 우리가 아는 시간적인 일치(오후 한 시) 외에도,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 현실이 정확히 일치함을 다시 한번 확증한다.
처음에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간 이 왕실 관리의 믿음은 결국 열매를 맺어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는 씨앗이 된다.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 있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4,53).
여기에서 ‘왕실 관리’였던 그는 ‘사람’이 되고 비로소 ‘아버지’로 거듭난다. 그는 왕실 관리로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예수님을 만난 뒤 믿음을 갖기 시작한 ‘사람’으로 변했고, 결국 진정 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아버지’로 거듭난 것이다. (왕실 관리 > 사람 > 아버지)
과연 자녀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세속적 지위로 얻는 특혜일까? 아니면 믿음을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일까?
두 번째 표징: 온 가족의 믿음
예수님께 인도하여 안드레아를 믿게 만든 세례자 요한처럼(1,36-37.39),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한 안드레아처럼(1,41-42), 또 나타나엘을 믿게 한 필립보처럼(1,45-51), 사마리아인들을 예수님께 데려가 믿음으로 이끈 사마리아 여인처럼(4,28-30.42), 이 왕실 관리 역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들을 예수님을 믿는 이들로 만들어 준다. 그는 단순히 아들의 생명을 살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온 가족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준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두 번째 표징 이야기의 결론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어 두 번째 표징을 일으키셨다(4,54).
이것이 아들의 치유가 아니라, 왕실 관리의 온 가족이 믿게 된 뒤에 표징을 언급하는 이유다. 자세히 돌아보면,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초점이 죽어 가는 아들이 아닌, 그의 아버지인 왕실 관리의 변화 과정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들의 대사는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심지어 아들이 직접 나온 장면조차 없다. 우리는 그의 치유 이야기를 종들에게 전해 들을 뿐이다. 왜일까?
이 이야기는 아들이 되살아난 사건보다 이 왕실 관리가 믿음을 통해 변화되는 과정에 있으며, 그의 변화 과정이 우리의 변화 과정이 되어야 함을 은연중에 보여 주는 것이다.
아들에 대한 사랑이 결국 생명을 얻게 해 준 믿음으로 거듭난 왕실 관리. 우리 역시 그 사랑과 믿음으로 초대받고 있다.
* 다음 화에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