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말씀
관상 기도를 한다면 아버지가 어떠한 표정과 목소리로 예수님께 간청했을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 앞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대답은 다소 뜻밖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영화에서 흔히 보는 평범한 휴머니즘 스토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마 우리는 이런 답변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구나. 네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충분히 알겠다. 함께 가자. 아들을 다시 살려 주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직접 이 아버지의 요청을 들어주시지 않고, 그 자리에 있던 청중에게도 한 가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신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4,48)
왕실 관리뿐만 아니라 ‘너희’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이미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도 살펴보았다(3,7). 요한 복음에서는 만약 예수님께서 어떤 표징을 행하신다면, 그것은 단순히 놀라운 일이나 경탄만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다.
요한 복음 내에서의 표징은 철저히 ‘믿음’과 결부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시기 전 표징만을 보고 당신을 맞이한 사람들에게, 표징으로부터 자유로운 믿음을 가질 것을 단단히 일러두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표징을 기초로 한 믿음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려는 의도다.
따라서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히 차가운 반응이라고 취급하기는 어렵다.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거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의 말씀은 당신이 행하실 표징이 단순한 기적 이슈로 머무르지 않길 바라시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분은 병자의 치유 기적에만 매몰되어 있는 군중과, 더 나아가 우리 독자들에게도 ‘표징’과 ‘믿음’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던지신다. 마치 표징에 매몰되어 찾아온 니코데모에게 ‘새로 태어남’이라는 주제를 던지신 것처럼 말이다.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1-3)
하지만 왕실 관리는 이와 같은 뜻밖의 예수님의 답변에 주눅 들지 않고, 아들을 살려내겠다는 마음으로 그분께 다시 간청을 드린다.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4,49).
천신만고 끝에 어렵게 만난 그분을 두고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 있다.”(4,50)
그 부성애에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이신 것일까? 아니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왕실 관리를 마주하기 전부터 아들을 살려내기로 마음먹으셨을까? 이는 우리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진다. 다만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아들의 상황에 관한 예수님의 표현이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 있다.”
우리말 성경에서 ‘살아날 것이다’라고 번역된 이 말씀은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살아 있다’라는 현재 시제로 표현되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순간 이미 아들이 살아났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에 왕실 관리를 마중하러 나온 종들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 있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4,53).
우리가 이 당시 아버지의 입장이라면 어땠을까? 예수님이 직접 아들에게 가 주시길 원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향한 왕실 관리의 믿음이 다시금 요구된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살았으니, 혼자 다시 아들에게 돌아가라고 말씀하신다. 마치 하느님의 첫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이 그러했듯(창세 12,1-4), 왕실 관리는 그분의 말씀 외에는 그 어떤 보증 없이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왕실 관리는 결국 아들이 살아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집을 향한 걱정스러운 여정을 홀로 다시 걷는다. 우리의 어머니께서도 같은 카나에서 표징이 일어날 때 종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2,5)
첫 믿음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여기에서 복음서는 왕실 관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4,50).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믿기 시작한 이 순간, 복음서는 이 인물을 ‘왕실 관리’가 아니라 ‘사람’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사회적으로 자신이 의존해 왔던 왕실 관리라는 직책보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존하는 실존적인 ‘사람’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