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여러분은 복음을 어떻게 읽고 계시나요?
매일 성경 한 줄을 읽으면서 하루를 경건하게 시작하는 분도 계실 것이고, 매일 미사의 복음에 집중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혹 성경 필사를 하면서 그 말씀의 맛을 음미하는 분도 계시겠죠. 이렇게 성경을 가까이하는 자세는 신앙인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그 뜻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부와 성인들은 성경을 늘 가까이하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건 중요하지만 성경을 ‘잘’ 읽는 건 다른 차원입니다. 이미 결과를 알고 보는 드라마나 영화는 재미가 반감됩니다. 이어질 내용을 알기에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맛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장소나 공간, 만나는 사람같이 작은 부분에 매여 큰 숲을 보지 못하기도 하고, 비슷한 말씀을 대충 흘려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통해서 ‘원래 그런 거야’ 하는 식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선입관을 가지고 성경을 바라보게 되면 삶으로 연결하기가 어렵습니다. 단순히 지식을 재확인하게 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질문을 하면서 성경을 읽는 자세입니다. 성경을 안 읽는 것보다는 읽는 게 좋지만, 이왕 읽기로 했다면 나의 신앙이 성장할 수 있도록 제대로 잘 읽는 편이 좋겠죠.
질문을 하면서 읽는 방법이란?
내 삶을 기반으로 예수님의 여정을 천천히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체크를 한 후에 그 답을 스스로 찾아보는 것이죠. 해설서를 봐도 좋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나 문화를 참고해도 좋습니다. 중요한 건 질문을 던지면서 답을 찾아가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무조건 정답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는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지만 그분을 기록한 제자들은 사람이신 예수님을 먼저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서서히 신앙을 고백하는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때, 내 안에 예수님은 그저 멀리 있는 하느님이 아닌 나와 함께하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나를 사랑하는 분이심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한 작가가 쓴 책 두 권을 추천합니다.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찾아가는 신앙인들의 길을 잘 보여 주는 엔도 슈사쿠의 《예수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가 예수님의 생애를 나름의 시선으로 찾아가는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신앙인의 눈이 아닌 소설가의 눈으로 바라보고 신학적 해석보다는 상상력과 논리적 판단으로 길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서를 나름의 관점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자기 삶 안으로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예수님이 참 행복이자 구원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사람이 되어 오셨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또 부활하시어 당신이 참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신 그 신비를 깨닫고 그분의 길을 따라갈 때 우리 역시 부활하여 참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의 공식으로 받아들인다면, 마치 기계와 같이 이렇게 살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판기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죠.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함성을 지르고, 제자들은 그분을 배신하여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홀로 죽음의 길을 걸어가야 했던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엔도 슈사쿠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주변인들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군중은 민족을 해방해 줄 메시아를 기대했고,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스승의 뜻을 이루어 줄 선지자가 되길 기대했으며, 유다 지도부는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에 이용하려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으로 보일 뿐이었죠. 이렇게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제외하고 그분의 생애를 따라가면 그분이 참으로 고독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을 전하는 예수님을 깨닫게 되면 그분의 메시지가 얼마나 무게감이 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생애》를 통해서는 연약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내가 느끼고 찾아가는 노력을 통해 나는 어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의 생애》에 이어서 《그리스도의 탄생》은 초기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믿음의 대상으로 변해 가는 흐름을 소설가의 시선으로 담고 있지요. 물론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하면서 부활을 의심할 수 있는 위험도 따라옵니다. 하지만 다양한 단서 안에서 신앙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왜 목숨을 바쳐 순교했을까?
제자들은 어떻게 공통된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을까?
엔도 슈사쿠는 자연스럽게 고백합니다. “예수의 불가사의는 아무리 합리적으로 해석하려고 해도 해결할 수 없는 신비이다.” 저자는 이 고백을 통해 부활 신앙은 결국 이해할 수 없는 체험의 영역임을 말하고 있죠. 소설가답게 소재 그대로를 표현하기보다 다른 차원에서 자신의 말과 이미지로 재구성해 나가며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신앙 고백은 스승이신 예수님을 저버리고 배신한 비애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에 행해진 박해로 더욱 구체화하였고, 교회 공동체 내에 여러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는 가운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시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제자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부활을 희망하고 부활 중심의 신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자신들의 선택을 고집하는 몸부림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저자는 이렇게 풀어 봅니다.
“하느님이 왜 침묵을 지키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왜 재림하지 않는가?
이 수수께끼는 오히려 신앙의 원동력이 되었다.” (250쪽)
신앙에 의문을 가지고 길을 찾는 여정은 결국 스승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이는 것처럼, 신앙도 아는 만큼 행동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앎은 그저 주어진 걸 외우는 단계를 넘어 자기 나름대로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천천히 채워지게 됩니다. 교회의 가르침 안에 있다면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는 자신만의 향기와 색깔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엔도 슈사쿠와 함께 예수님을 찾아가는 자신만의 여정을 걸어가 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