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62,1-5; 1코린 12,4-11; 요한 2,1-11]
오늘은 연중 제2주일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 주님 세례 축일에 이어서 ‘공현’, 곧 주님께서 공적으로 드러나셨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주님 공현의 삼중 차원”, 《강론지침》 124항).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서에서만 등장하는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요한 2,1-11)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처음으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요한 2,11 참조). ‘표징’은 그리스어 명사 ‘세메이온’의 번역입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표징’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활동 안에서 현존하시어 구원을 베푸심을 표현합니다. ‘기적’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지니신 놀라운 신적 권능을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표징’은 기적 자체가 계시하는 바, 다시 말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리고 그분의 신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는 ‘표징’을 보여 주심으로써 당신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아버지와의 일치를 증명하시면서, 동시에 당신의 활동 안에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보여 주신 ‘표징’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킵니다. 혼인 잔치가 열린 날은 “사흘째 되는 날”(요한 2,1)로서, 이는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신 파스카 사건을 암시합니다. 물과 포도주는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와 물(요한 19,34)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에서 만난 어머니를 향해 “여인이시여”(요한 2,4)라고 부르셨는데, 이 호칭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곁에 계셨던 어머니를 부르신 장면(요한 19,26)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에 초대받아 그곳에서 ‘첫 번째’ 표징을 보여 주셨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구약의 예언서에서는 ‘혼인 잔치’가 도래할 메시아 시대를 상징하는 배경으로 사용되고 있고(예를 들면, 호세 2,19-20; 이사 25,6-8; 예레 2,2), 신약의 복음서에도 이와 유사한 용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예를 들면, 마태 22,1-14; 루카 22,16-18). 특별히 요한 묵시록 19장 9절에서는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기 위해 ‘혼인 잔치’라는 무대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혼인 잔치를 배경으로 메시아 시대의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는데(이사 62,4-5), 이를 통해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완성될 하느님의 약속을 미리 만나도록 초대합니다. 이사 62장 1-5절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시온을 더 이상 ‘소박맞은 여인’ 또는 ‘버림받은 여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고, ‘혼인한 여인’ 또는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시온은 “주님께서 친히 지어 주실 새 이름”을 얻게 되고 하느님의 신부로 등장합니다. 시온의 신랑은 하느님, 하느님의 신부는 시온입니다. 바빌론 유배로부터 귀환 이후 예루살렘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표징’을 보여 주신 이유는 당신의 제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요한 2,11 참조). 반면에 우리는 예수님의 표징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의 표징을 목격한 이들의 믿음보다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 곁에서 표징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그 믿음이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완전한 믿음은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때 가능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1,5)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완전하게 될 때, 하느님의 영광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통해 환히 빛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