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혼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는 질문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위력 관계가 전제된 듯한 느낌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마치 아내가 남편의 소유물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당시 여성은 남성의 재산 목록 중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몇몇 라삐들은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어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신명 24,1)라는 말씀을 해석하면서,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난다.”라는 말을 아름다운 미모로 적용해서 아내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 때문에 남편은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이는 여성에 대한 지배력과 남성 우월적 사고의 과장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제기한 혼인 문제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배와 우월성이 담긴 질문에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몸’이라는 표현은 서로 섞인다는 의미보다는 지배와 우월적 지위가 사라진 동등한 협력자, 파트너로서의 모습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이 이를 잘 대변합니다.
창세 2,5~25에 나오는 에덴동산 이야기에서는 여성의 창조 과정이 잘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 먹으면 안 된다고 아담에게 경고하신 다음, 사람이 혼자 있는 게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다짐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온갖 짐승과 새들을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갔지만, 사람은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합니다. 여기서 ‘알맞은 협력자’라는 표현은 ‘에제르 커넥또(עֵ֖זֶר כְּנֶגְדּֽו)’인데, 에제르(עֵ֖זֶר)는 ‘돕다’, ‘지지하다’라는 ‘아자르(עָזַר)’라는 단어에 기원을 둡니다. 그리고 ‘커넥또(כְּנֶגְדּֽוֹ)’는 ‘그와 마주하는’, ‘그의 상대가 되는’, ‘그에게 대등하게 어울리는’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알맞은 협력자’라는 것은 서로 마주 보면서 상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동물에게서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 아담의 갈빗대에서 여자, 하와를 만드십니다. 이제 사람, 아담은 여자의 창조로 인해 남자라는 자의식을 갖게 되고, 하와는 남자 아담을 통해 여자라는 자의식을 갖게 됩니다. 즉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존재를 통해 자신들의 본성을 잘 이해하게 되고, 알맞은 협력자로서 상호 보완하는 관계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힘이 약한 여성을 착취하려고 하며, 보호라는 명분으로 여성을 남자의 소유물로 여기려 합니다. 분명 남자와 여자는 서로 마주 보면서 각자의 존재를 더욱더 깊게 알아갈 수 있는 관계이지만, 힘의 논리가 이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아이들은 인종이 달라도, 언어가 달라도, 무언가 통하는 게 있는지 함께 몰려다니면서 재미나게 놉니다. 아이들에게는 피부색, 성별, 언어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는 힘, 피부색, 성별 등 모든 차이가 필요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아껴 주고 보호해 주면서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힘의 우위로 사람을 나누고 차별하려 합니다. 이에 우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화합과 일치의 정신을 구현해 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현장은 바로 가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일 복음: 마르 10,2-16.
참조
김혜윤, 《성경 본문 줌인》, 생활성서사, 2021년, 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