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를 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든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같은 말씀을 하시니 우리가 알던 예수님이신지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단순히 무섭고 냉정하게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예언자적 모습을 드러낸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언자적 모습이라 하면 자칫 미래를 알아맞히는 능력을 떠올릴 수 있지만, 예언자는 미래를 예고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지켜지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 바로 예언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정의와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의와 진리의 말씀을 좋아하면서도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말씀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은 구약 성경 속 예언자들의 등장과 함께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살던 시대, 사람들은 우상 숭배와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화려한 제사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화려한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이방인과 고아,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무죄한 이들이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예레 7,6 참조). 예레미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성전에 있는 유다 주민을 향해 저주에 가까운 말을 던집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내가 너희 앞에 세워 둔 내 법대로 걷지 않는다면, 또 내가 너희에게 잇달아 보낸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는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리고, 이 도성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게 하겠다.”(예레 26,4-6)
이 말을 들은 사제들과 대신들,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다는 저주의 말을 했다면서, 그를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쳤습니다. 결국 예언자의 말은 사람들에게 분란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이들은 회개하고, 어떤 이들은 완고해지며 분열이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은 듣고 회개하는 쪽과 회피하고 저주하는 쪽으로 사람들을 분열시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왜 그러한 분열과 갈등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래 주님은 가련한 이들, 가난한 이들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시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가련한 이들에 대한 핍박과 가난한 이들의 신음 때문에 이제 내가 일어서리라.”(시편 12,6)
그러나 인간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련하고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과오를 반복해 왔으며, 예언자들은 이를 외면하지 않고 강한 어조로 꾸짖으며 주님의 말씀을 전해 왔습니다. 그들은 가련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겨 사회 정의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경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분열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의 평화는, 사회 정의가 실현된 평화였습니다.
1980년대 군사 정권으로 비롯된 독재에 대항해 교회는 정의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이때 몇몇 언론이나 정부에서는 교회가 평화를 주장하기보다 분란을 조장한다고 선동했습니다. 정의의 목소리가 그들에게는 분란의 소리로 들렸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부조리 속에서 흔들리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시며 세상에 정의와 진리의 불을 던지셨습니다.
이 말씀에 힘을 얻어 우리 신앙인들은 부조리 속에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진정한 정의와 진리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고,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누구 차례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