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 학창 시절 숙제로 받은 일기나 영어 수필, 자기소개서처럼 형식적인 글을 써 보긴 했지만, 내 생각과 마음을 거짓 없이 글에 담아내기 시작한 것은 사춘기와 인생의 첫 고비를 마주했을 때부터였다. 수많은 글은 그야말로 울분과 회한의 파편들이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사람에 대한 불신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원망까지. 그분께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나요.”라고 여쭤보고, ‘당신은 또 침묵하십니다.’로 끝나는 문장이 반복됐다. 때로는 유서처럼 보일 만큼 어두운 글을 쓰기도 했다.
나는 내가 왜 글을 쓰는지 몰랐다. 다만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고, 복잡한 마음을 해소할 유일한 방식이 그것뿐이라 여겼다. 고등학교 1학년 무렵에는 여행 작가가 되겠다며 자퇴를 시도한 적도 있었다. 주변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글을 향한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글쓰기를 놓지 않은 채 어느덧 7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노트북 메모장에는 제목도 없는 문장의 조각들이 켜켜이 쌓여 간다.
그러던 하루, 어느 강의의 과제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고백록》을 읽게 됐다. 방황과 갈망의 기록 속에서 성인은 모든 것을 ‘고백’이라는 언어로 진실하게 풀어 놓았다. 책을 덮은 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우구스티노 성인 왜 ‘고백’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었는지. 나 역시 나의 고백을 계속 써 내려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회개의 상징,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생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354년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깊은 방황과 회의를 겪었다. 학문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카르타고와 로마 등지에서 수사학과 철학을 공부하며 교사로 활동했고, 당시 유행하던 마니교와 회의론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도 내면의 공허를 메우지 못했고, 그는 계속해서 진리를 갈망했다.
3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그가 정원에서 눈물로 기도하던 때였다. 불현듯 “들어서 읽어 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즉시 성경을 펼쳐 들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 13,13-14)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갑작스러운 은총의 빛이 그의 마음을 비추는 듯했다. 그의 두 눈에서 회개의 눈물이 흘렀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하느님께 돌아갔다.
이듬해 그는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오 성인에게 세례를 받고, 이후 어머니와 함께 아프리카로 돌아와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396년 히포의 주교로 임명된 그는 그곳에서 34년간 신자들을 가르치며, 기도와 연구, 설교, 저술에 헌신하였다. 그의 저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고백록》이다. 이 책은 단순한 자서전을 넘어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은총, 영혼의 깊은 내면과 신앙의 본질을 고백하는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책 안에서 자신의 어두운 방황과 죄의 여정을 솔직히 풀어내며, 그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은총을 발견했는지를 전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430년 히포에서 선종하였으며, 8월 28일은 축일로 기념된다. 그의 삶은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들을 구하러 왔기 때문이다.”(마태 18,11)라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살아 낸 증거이며, 오늘날에도 수많은 이에게 회개와 믿음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고 있다.
“내 사슬을 끊어주셨사오니 찬미의 제사를 올리나이다.”
짧은 삶을 돌아보다 보면, 글을 향한 관심은 훨씬 더 이른 곳에서 시작된 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돌잡이 때의 일화처럼 말이다. 나는 연필을 두 번이나 집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여러 물건 중 연필을 골랐고, 두 번째에는 연필을 숨겨 둔 채 다시 돌잡이를 하였는데, 끝내 연필을 찾아냈다고 한다. 어른들은 “나중에 커서 공부를 잘하겠구나.” 하며 웃었지만, 내게 연필은 공부가 아니라 ‘표현’과 ‘글’로 향하는 출발점이었다.
(사진 ⓒ 김윤우.) |
현재 원고를 쓰고 있는 내 모습만 보아도 그렇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고등학교 자퇴를 결심했지만, 그것이 무산되었을 때 나는 세상을 다 잃은 듯 절망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도 쓰고 싶던 글로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감정을 토해 내듯 썼던 글들은 풀어낼 수 있는 새로운 글감과 영감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또한 오랜 시간 써 내려간 감정의 혼돈과 절망의 문장들은 결국 하느님을 향한 나만의 기도였음을 알게 됐다. 찬미도 고백도 아니었지만, 분노와 고통을 담은 문장들은 하느님께 건네는 하나의 언어였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 문장들이 기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됐다. 그렇게 쓰인 서툰 기록들이, 어느새 나를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계속해서 문장을 꺼내 놓는다. 물론 여전히 하느님께 원망과 절망의 말을 쏟아놓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글을 쓴다는 이 행위 자체에, 내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끄시는 하느님의 응답이 들어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어느새 내 글에는 찬미와 신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제 글쓰기는 기도와 삶이 맞닿는 또 다른 형식이며,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은총의 방식이 됐다.
하나의 바람도 생겼다. 내가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써 내려가는 이 글이, 나를 넘어 삶이나 신앙에 지쳐 있는 또래 청년들에게 작은 위로와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 이따금 그분에게서 멀어지는 듯한 순간이 오더라도, 우리가 하느님 안에 살고 있으며 그분께서는 언제나 한없이 반겨 주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하느님께로 향하는 누군가의 걸음에 작은 등불이 되기를 바란다.
주님, 당신께서는 온갖 미움을 받으시면서도 인간이 무엇이길래, 이 땅에 오셨나이까.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아버지의 뜻만을 따라, 야유와 비난이 난무하는 세상에 오시어 그 고난을 온전히 감당하셨는지 짐작할 수조차 없습니다.
저는 당신의 뜻에 동참하고자 하나, 때로는 어떤 말씀도 없으신 당신의 침묵이 두렵기만 합니다. 허나, 당신께서 저를 통해 무엇을 이루시고자 하는지 영원히 알지 못하더라도, 오직 당신께 저를 온전히 맡기옵니다.
*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