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 시절 인천교구 신학생은 방학 동안 의무적으로 7박 8일 피정을 해야 했다. 당시 3학년이었던 나는 피정에 참여하기 위해 왜관에 자리 잡은 베네딕토 수녀원으로 향했다. 피정이 무르익을 즘, 신학생들은 식당에 나눔을 하기 위해 모였다.
‘쨍그랑!’
그때 출입문 쪽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 함께 서둘러 문 쪽으로 갔다. 그곳에는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예고 없이 방문하신 신학교 영성 지도 신부님께서 서 계셨다. 그렇다. 그 요란한 소리는 신부님께서 선물로 가져오신 발효주가 깨지면서 난 것이었다. 우리는 신부님과 제대로 인사도 못 한 채 잔해를 치워야만 했다. 하지만 발효주의 향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
그때 아쉽게도 발효주를 맛볼 수는 없었지만, 그만큼 오랫동안 남아 있던 이 향으로 인해 우리를 향한 신부님의 애정을 오히려 더욱 오래,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 향이 아직도 가시질 않았는지, 마리아가 예수님을 도유할 때 향이 방에 가득 찼다는 복음 말씀을 읽으면 그때 생각이 떠오른다.
요한 복음의 작은 히로인, 베타니아의 마리아
요한 복음은 라자로의 누이, 베타니아의 마리아를 향유로 예수님을 도유한 사람으로 소개한다(11,2). 마리아는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를 담고 있는 11장과 예수님의 발을 도유한 마리아의 모습이 나오는 12장, 두 차례에 걸쳐 등장한다. 마리아는 총 21장으로 구성된 요한 복음의 중심 부분에 등장한다. 더군다나 이 부분은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마치고 수난 국면에 들어가게 되는 전환점에 해당한다. 그만큼 이 인물은 요한 복음의 전체적 구조 안에서 작지 않은 역할을 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루카 복음에도 등장한다(루카 10,38-42). 루카 복음 속 활동적인 마르타와 정적인 마리아의 모습이 요한 복음 안에도 담겨 있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는 두 사람의 정확한 관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언니 마르타와 동생 마리아’는 사회 통념에 이끌린 간접적 추론일 뿐이며, 두 사람의 관계를 표현한 희랍어 단어인 아델페(ἀδελφή)는 ‘자매’ 그 이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참고로 두 사람과 라자로의 관계를 표현하는 희랍어 단어 아델포스(ἀδελφός)도 ‘형제’를 의미할 뿐 두 사람의 오빠였는지, 셋 중 둘째였는지, 심지어 막내였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요한 복음 속 마리아는 루카 복음에서와 같이(루카 10,39) 능동적이기보단 수동적이고 정적인 인물로 보인다(11,20). 그러나 우리가 놓치기 쉬운 차이점이 하나 있다. 루카 복음 속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반면, 요한 복음 속 마리아는 그분의 발을 씻겨드린다(12,3). 이는 요한 복음 속 마리아가 예수님께 강한 친밀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존경과 애정
예수님께 한없는 존경과 애정을 드러내는 마리아는 어떻게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까? 요한 복음은 이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 대신, 더 중요한 것을 각인시키고자 한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여자인데, 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11,2)
마리아가 주님께 향유를 부은 것은 이보다 뒤인 12장에 나오는 장면이다. 그러나 저자는 11장에서 우리에게 이 장면을 미리 말해 주면서, 마리아의 도유가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는지 알려 준다. 또한 라자로가 죽음에 이를 정도의 위독한 병에 걸리자,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이를 알린 사람도 마리아였다.
그리하여 그 자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3)
마리아는 예수님께 라자로를 치유해 달라고 청하지 않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다고 상황을 설명한다. 이는 ‘포도주가 없구나.’라고 예수님께 간접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시는 어머니 마리아와 닮았다(2,3). 간접적인 청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 또한 신비롭게 닮아 있다.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11,6)
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차가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요한 복음 저자는 이 가운데에서 라자로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명백하게 드러낸다(11,5).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 왜 그렇다면 바로 라자로에게 가지 않으셨을까? 그가 죽기 전에 가실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부러 베타니아에 찾아가지 않으셨다고 생각하기 쉽다. 나는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음을 맞이한 뒤에야 베타니아로 가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11,17)
당시 예수님께서 계시던 곳(요르단강 건너편)과 베타니아는 2마일, 곧 3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부지런히 걷는다면 한두 시간 정도 걸릴 거리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도착하신 시간이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된 때라면, 그분께서 소식을 처음 들으셨을 때의 라자로는 이미 숨이 멎은 상태였을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신 이유는, 라자로가 ‘실제로’ 죽음을 맞이하였고, 이로부터 살아났다는 것을 군중에게 더욱 확실히 보여 줘 그들이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 아닐까.
죽은 이의 소생 기적은 마르코 복음과 루카 복음 등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요한 복음 속 라자로 이야기는 이미 그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시신이 상하기 시작했을 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11,39) 더 권능적이다.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이야기(마르 5,21-43); 나인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이야기(루카 7,11-17).
물론 마리아는 사실이 어떠하든 예수님께서 곧바로 오시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는 이틀이나 늦게 오신 예수님 앞에서도 그분께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는다. 예수님이 오시자 먼저 마중 나가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마르타는 집안에서 있던 마리아를 부른다.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 (11,28)
마리아는 곧바로 일어나 예수님께로 간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이를 보고 그녀가 무덤에서 애도하기 위해 나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11,29)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그를 위로하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갔다.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11,31)
예수님께 간 마리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동사는 ‘듣다’(아쿠오, ἀκούω)이다. 이 동사는 요한 복음 속 목자의 비유에서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을 따르는 양들의 모습을 표현한다(10,27). 마리아는 마치 자신을 부르는 목자에게 달려가는 양처럼,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을 뵈러 간 것이다. 마리아는 여전히 주인이신 그분을 사랑하고 있었다.
온전한 인간이자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유다인들은 라자로의 죽음을 생각하며 나가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집을 나선다. 예수님께 도착한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말한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11,32)
이는 마르타가 처음에 예수님을 뵈었을 때 한 말과 같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11,21)
이처럼 두 자매는 성격과 성향이 다르지만, 주님 앞에서는 한마음으로 그분께 같은 신앙을 고백한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보이시는 예수님의 반응은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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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11,23)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11, 25-26)
[마리아에게]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11,33)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11,35) |
마르타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의연하시며, 생명과 죽음에 관한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의 신성이 느껴진다. 반면에 마리아 앞에서 보여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하염없이 슬퍼하는 인간적인 모습이다. 그분께서 온전히 하느님이시자 온전히 사람이심을 두 자매를 통해서 느낄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 ‘마리아’
신학생 시절, 선배에게 ‘가장 인간적인 것이 바로 가장 신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저 사제는 참 인간적이야’라는 말을 듣는 사제는 충분히 예수님을 드러낼 수 있을 것만 같다.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웃의 고통에 우실 줄 아시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처럼 완벽하고 거룩할 수 없지만, 따스한 사람, 애정이 드러나는 사람, 이웃의 아픔에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 곧 ‘사람 냄새 나는 사람’이 될 수는 있다.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라자로를 다시 살려 가족 품에 안겨 주신다. 마리아를 따라온 수많은 유다인은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고, 그분의 표징을 체험하게 되었다. 마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유다인들을 집에서 데리고 나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그들에게 드러냈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사도들에게 전한 막달라 여자 마리아처럼(20,11-18), 그녀는 예수님의 권능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는 제자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러한 마리아의 모습은, 그녀를 부르러 온 마르타의 말에서 이미 드러났다.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 (11,28)
마리아는 단순히 그분을 사랑한 이가 아니라, 스승이신 그분을 사랑한 제자였다. 마리아 막달레나 역시 부활하신 그분께 다음과 같이 말씀드린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20,16)
참제자로서 마리아의 모습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파스카 축제 엿새 전 다시 베타니아를 찾으신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열렸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비싼 향유로 도유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12,3)
최후의 만찬 때에 하실 예수님의 말씀을 미리 실천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매우 놀랍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13,13-15)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다. 모두가 기뻐하는 가운데, 왜 마리아는 혼자 눈물을 흘리며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것일까? 잔치는 무르익어 흥겨움이 넘쳐흐르지만, 이미 마리아는 그분이 머지않아 떠나실 것임을 예감한 것일까?
*다음 화에 계속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