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모든 것이 차갑게 얼어붙은 이 계절을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보내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크리스마스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시기에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그분이 세상에 오신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상징하는 대림, 성탄 시기를 어떻게 하면 더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지 묵상하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를 읽어 보자.
우리는 희망에 대해 말할 때, 종종 인간의 힘 안에 있지 않은 것,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언급하곤 합니다. 사실,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과 시선 너머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원을 시작하는 가운데 그와는 다른 희망, 즉 신뢰할 수 있고 가시적으로 보이는, 이해 가능한 희망에 대해 말해 줍니다. 그 희망은 하느님 안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당신과 더불어 걸을 수 있는 힘을 선사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함께 걸으십니다. 충만한 생명을 향한 여정은 때론 힘에 부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여정에 그분이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힘을 선사받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희망이란 늘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향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망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희망은 우리의 여정 중에 언제나 존재하며, 우리로 하여금 한 발짝 더 나아가게 합니다.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께서 우리에게 선사해 주는 이 희망은 현재를 위한 원대한 목표, 즉 인류를 위한 구원, 자비하신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사람을 위한 지복을 제공해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모든 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 다시 말해, 우리는 희망과 더불어 이 세상을 걷는 가운데 구원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각자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과연 나는 희망과 함께 걷고 있는가? 혹여 나의 내적 생활이 멈춰 서고 폐쇄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가? 혹여 나의 마음은 서랍처럼 굳게 닫혀 있는가? 아니면 혼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여정을 걷도록 희망을 향해 활짝 열린 서랍 같은가?
대림 시기 동안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집에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에 따라 구유가 준비됩니다. 구유는 그 단순한 모습과 더불어 희망을 전해 줍니다. 구유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은 이 희망의 분위기에 잠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장소인 베들레헴으로 가 봅시다. 베들레헴은 유다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천 년 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간택하신 목동 다윗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베들레헴은 중요한 도시가 아니지만, 작고 비천한 이들을 통해 당신의 섭리를 드러내시는 하느님께서 선호하실 만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고대해 온 ‘다윗의 후손’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바로 그분에게서 하느님의 희망과 인간의 희망이 서로 만나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 곁에는 희망의 어머니, 성모님이 있습니다. 성모님은 “예.” 하고 대답하심으로써 하느님께 우리 세상으로 들어오는 문을 여셨습니다. 처녀이신 그분의 마음은 희망과 온전한 믿음으로 가득 차 생기 넘쳤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미리 선택하셨고,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모님은 9개월 동안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궤가 되었습니다. 성모님은 당신 백성을 비롯해 인류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인 아기 예수님을 인자롭게 바라봅니다.
성모님 곁에는 이사이와 다윗의 자손인 요셉 성인이 서 있습니다. 그 또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하느님께서 친히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부르도록 명하신 것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에는 모든 사람을 위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이 아기를 통해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유를 바라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목동들도 구유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 목동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루카 2,25)이자 “예루살렘의 구원”(루카 2,38)인 메시아를 고대해 온 비천하고 가난한 이들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고, 마침내 하느님의 구원이 본인들에게 이르게 될 것을 희망했습니다.
자신이 마련한 안락함, 특히 물질적인 것에 기대는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을 바라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이 점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리라는 유일한 보장은 하느님 가운데 희망하는 것뿐입니다. 이 희망은 강하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며, 인생의 여정을 기쁘게 걷게 해 줍니다. 또한 선을 행하려는 원의, 영원히 행복하고자 하는 원의와 함께 이 여정을 걷게 해 줍니다. 작고 비천한 자인 이 목동들은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희망을 두며 천사들이 가르쳐 준 표징을 아기 예수님 안에서 알아보고 기뻐합니다(루카 2,12 참조). 이들을 둘러싼 천사들의 무리는 아기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위대한 계획을 천상에서 선포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사랑과 정의와 평화로 이루어지는 당신의 나라를 세우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표현하는 가운데 드러납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대림 시기에 구유를 관상하면서 주님의 탄생을 준비하기로 합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개인적, 공동체적 역사의 밭고랑에 뿌린 희망의 씨앗인 예수님을 맞아들인다면, 그분의 탄생은 진정한 축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향해 드리는 “예.” 하는 모든 응답은 ‘희망의 싹’입니다. 이 ‘희망의 싹’, 그분께 드리는 긍정적인 응답을 신뢰하기로 합시다. “예, 예수님. 당신은 저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저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 이 콘텐츠는 《그래도 희망》 일부를 발췌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