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 조배(聖體朝拜, Visitatio SSmi Sacramenti 또는 adoratio Eucharistiae)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을 내려보면 성체 조배란, (말 그대로 본다면) 성체 앞에서 조배 즉 알현하여 뵙고 절을 올리고 감사를 드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성체 조배의 의미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행위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목적과 태도를 실현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체 조배의 의미는 더욱 확장된다. 즉, 주님을 뵙는 행위를 통해 사랑과 합당한 존경이라는 목표를 이루고,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인격적 만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 일치를 이루며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 이를 성체 조배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성령께서 조배자를 이끌어 주실 때에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다. 성체 조배라는 행위의 의미는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그리스도와의 영적 일치로 나아가는 데 있다. 종합하면 성체 조배는 성령의 이끄심을 바탕으로, 성체 앞에서 주님께 믿음과 사랑, 마땅한 흠숭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이로써 조배자는 참된 행복과 참사랑으로 향하여 자신의 영혼을 구할 수 있게 된다.
성체 조배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성체 조배가 교회 역사 안에서 처음부터 행해진 것은 아니다. 물론 초대 교회에서도 성체께 대한 흠숭과 존경은 이루어졌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때 받아먹으라고 내주신 것을 기억했다. 또한 성찬례로 최후의 만찬을 재현해 거룩하신 주님을 기억하고 기념했다.
하지만 박해 시대 때는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전례를 거행하거나 가정집을 활용하여 성찬례를 거행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성체 보관은 성찬례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의 필요를 위한 것이었기에, 성체의 의미도 그에 한정되어 있었다.
훗날 신앙의 자유가 주어져 바실리카와 같은 성전 건물이 생겨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성전은 성체를 안전하게 보존하는 공간이었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기도하려 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성체를 모시고 가 가정에서 기도하는 신자들이 있긴 했지만, 공적인 공간인 성전에서 성체 조배를 하는 일은 드물었다. 이는 감실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제의방 안쪽에 마련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성체 조배가 등장하고 널리 퍼지기 시작한 건 중세 시대였다. 이는 중세 시대 교회의 언어가 라틴어로 고정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당시 라틴어는 소수의 특권층을 위한 언어였고, 이를 알아들을 수 없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라틴어로 거행되는 미사 전례 안에서 영적 갈망을 해소할 수 없었다. 대신 “성체는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의 볼 수 있는 표징이고 천상과 지상을 연결해 주는 고리와 같은 역할”(한국가톨릭 대사전 4834쪽 성체 신심 참조)로 여전히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기를 원했던 이들은 성체를 모신 감실을 찾아와 개인적으로 주님을 뵙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특히 종교 개혁을 통해 더욱 확산되었다. 종교 개혁자들이 실체 변화를 거부하고 성체를 부정하면서 가톨릭 신자들은 성체 신심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신앙인들은 감실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물론, 감실을 제대 중앙에 두기도 했다. 이는 성체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을 자주 뵙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그분과의 영적 일치를 이루어 가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성체 조배가 더욱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후 시대를 거치면서 성체 조배는 성체께 대한 공경이 고취되며 계속 퍼져 나갔다. 그리고 현재에는 성체 조배실을 따로 만들어 신자들이 성체 안에 계신 주님과 영적 일치를 이루어 가도록 권장하고 있다.
중요한 신심 행위가 된 성체 조배
하지만 성체 조배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성체 신심이 너무 과해지면서 여러 부작용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중 하나는 신앙인이 영성체를 주저하고 소홀히 하는 경향이었다. 성체 조배를 통해 성체의 거룩함이 과도하게 부각되면서, 신앙인은 스스로를 더럽고 추한 죄인으로 여겼다. 그런 자신이 어찌 감히 성체를 직접 받아 모실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더구나 성체 조배가 영적 체험을 얻게 해 주었기에, 미사에 참여해 굳이 영성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생겼다. 이렇게 영성체에 더해 미사 참석까지 소홀히 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교회 공동체는 미사 안에서 하나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한 공동체라는 인식을 공유하는데, 성체 신심은 개인적인 방법으로 성체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을 체험하게 한 것이다. 이는 공동체의 유대를 약화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성체 조배와 성찬례 거행 후 이어지는 영성체가 서로 어우러지지 않게 되었다. 결국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성체 조배 등 성체 신심과 미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성체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로 발표된 <전례 헌장>에 따르면, 성체 조배 등의 성체 신심은 전례와 조화를 이루고 신자들을 전례로 이끌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1973년에 발간된 《미사 없는 영성체와 성체 신심 예식서》 13~15항에 따르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생명의 빵이며 파스카인 그리스도와의 성령을 통한 일치가 미사를 통해 이루어지므로(1-4항) 성체 신심이 영성체를 통해 완결되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한국가톨릭대사전》 4836쪽 참조).
성체 조배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면
그러므로 성체 신심의 한 형태인 성체 조배 역시 영성체와의 연결 속에서 그 의미를 온전히 지닐 수 있다. 영성체로 나아가기 위해 성체 조배를 하는 것이지, 성체 조배를 위해 영성체를 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 보시기에 죄 많은 우리이지만,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거룩하신 몸을 생명의 양식으로 내주셨기에 그분의 몸을 받아 모시고 영적 일치를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분의 몸을 나누고 받아 모신 사도들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최후의 만찬을 재현한다. 물질인 빵을 나누고 받아 모심으로써 영적으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로 나아가는 것이다. 영이 육이 되시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성체 조배와 영성체는 주님과의 영적 일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만, 그분의 몸을 실제로 내 육신 안에 받아들이는 점에서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영성체를 통해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내가 그분과 온전히 하나 되어 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