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저는 정기적으로 ‘마음 디톡스’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한 달에 한 번, 친정 식구들과 하는 가정기도 시간인데요. 결혼하고 다른 지역에 사는 세 자매와 부모님이 모두 만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명절이나 가족 행사가 있어 만나더라도 저희 아이들과 조카들까지 모이면 반가움은 잠시,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정신이 없지요. 부모님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기란 쉽지 않았어요. 아쉬운 마음에 아이들은 빼고, 딱 어른들만 만나는 평일 두 시간을 약속했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몰라요.
말씀을 나누는 가정 기도 시간
가정 기도는 청년 시절 성서 모임에서의 경험을 녹여 말씀 나눔 형태로 진행하고 있어요. 복음 말씀을 다 같이 읽고 잠깐 묵상 후 각자 와닿은 것, 떠오르는 생각을 나눕니다. 부활을 며칠 앞두고는, 요한 복음 20, 1-9 말씀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저에게 가장 와닿은 부분은 ‘아직도 어두울 때’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였는데요. 두 구절이 저에게는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가장 어두울 때,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던 순간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왜 꼭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셔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혼자 돌아가셨다가 멋지게 짠 부활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마음이 가장 어두웠던 때, 지난 판공성사에서 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냉소와 무관심, 때로는 원망, 혐오 같은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내가 이렇게 차가운 사람이었나? 나는 왜 이렇게 사랑하지 못할까? 아이에게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거나, 남편과의 대화 중 괜히 날을 세우며 나를 지키려 애쓰는 순간들. 또는 일상 중에 마주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너무나 차가웠던 순간에도요. 그런 일들이 반복되고 쌓여 갈수록 마음은 무거워지고, 슬퍼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기보다 먼저 하느님이 자매님을 사랑하신다는 걸 느껴야 해요.
온전히 그 사랑 안에 머물러야, 비로소 누군가에게 그 사랑을 나눌 수 있어요.”
고해 사제의 말씀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어요. 전혀 떠올리지 못했거든요. 그저 내가 좀 지쳤나보다, 힘들었나보다 했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지는 생각조차 못 했던 거예요. 그 사랑 안에 머문 순간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매일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쳐내는 전투태세로 살고 있었어요. 묵주를 손에서 놓은 지 오래됐고, 말씀과 전례 안에서 기쁨을 누리던 순간에서도 멀어졌더라고요.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내가 사랑 안에 머무는 것에서 출발해야 했습니다.
보속 기도를 바치고 주보를 살펴보다가 ‘거룩한 독서’ 프로그램 모집 글을 본 것은 우연이 아니었어요. ‘말씀으로의 부르심’은 어떤 계시처럼 느껴졌어요.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는 일용할 사랑이, 말씀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래, 다시 시작해 보자.”
다시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을 물리적인 실천으로 연결해 보기로 다짐한 밤. 아이들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다가 마치 제 마음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기다렸다는 듯한 장면과 만났습니다. 이런 것을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고 해야 할까요.
봄과 희망을 그린 그림책
아이들에게 읽어 준 그림책 《거인의 외투》는 계절을 담당하는 세 거인의 이야기입니다. 청년과 같이 푸르고 뜨거운 열정의 옷을 입은 여름 거인, 노오랗게 물든 낙엽 옷을 입은 중년의 가을 거인, 그리고 하얀 눈과 노인의 백발을 떠올리게 하는 겨울 거인.
그들은 정해진 템포에 맞춰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갑니다. 가끔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보이지 않아 불안해합니다. 이제는 정말 와야 하는데 오지 않는 존재를 두고 세 거인이 입을 모아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외치는 순간, 까르르 웃음소리와 함께 나타난 작은 거인, 봄.
작은 거인은 아이의 모습입니다. 새로 나는 모든 것, 자라나는 모든 것이 그렇듯. 모두들 잃어버린 줄 알고 체념할 때 어딘가 숨어 있는 희망과 꿈, 새로움처럼요. 봄은 겨울 거인의 흰 외투 밑에 숨어 있다가 ‘까꿍’ 하고 장난스럽게 나타나요. 어두움 속 희망이,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로 자연스럽게 연상되었어요. 나의 가장 어두운 바로 그곳에 나를 살아가게 할 사랑, 희망의 씨앗이 숨어 있다는 것을요.
그림책은 참 신기해요. 짧은 문장과 따뜻한 그림 속에, 어른이 된 제 마음을 다독이는 힘이 숨어 있거든요. 어떤 장면 안에 조용히 머물다 보면 풀리지 않던 실타래 끝이 보이고, 답답하게 막혀 있던 마음에 작은 창문이 활짝 열려요. 쌓여 있던 묵은 감정이 바람 따라 흘러가듯 훌훌 떠나가고 신선하고 맑은 공기로 채워지는 것 같았어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
가정 기도 모임에서 했던 둘째의 나눔도 마음에 남았습니다. 제부가 동생에게 물었답니다. “그 사흘 동안, 신은 정말 사라졌던 걸까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 그 시간 속에서 그는 묻고 있었어요. 주님의 죽음이 진실이라면, 정말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거니까, 그 사흘 동안은 신이 없었던 것이냐는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곤란했다는 동생. “난 순수하게 믿고 있어요.”라고 답했지만, 그 말이 어쩐지 너무 얄팍하게 느껴졌고, 매일 기도하고 미사에 빠지지 않고 사도신경을 바치면서도 정작 이런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반성도 하게 되었다고요.
이렇다 할 답을 듣지 못한 제부는 어느 날 듣고 싶었던 답을 찾았고 큰 감동이 느껴졌다는 누군가의 대화 내용을 캡처해서 보내 주었다는데요.
“죽음이라는 것은 신이 인간의 가장 깊은 어둠, 필멸의 순간으로까지 내려간 것이며, 단순한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인간이 절대 홀로 가기를 바라지 않는 의지”, 이어서 “인간의 육체적인 한계, 언어의 한계 속에서도 신은 끝까지 인간에게 가닿으려는 제한 속에서 무한으로 향한 시도”와 같이 시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더 놀라운 건 이것이 AI와의 대화였답니다. 비록 학습된 내용을 기반으로 나눈 대화였지만, 다른 곳에서 얻지 못한 큰 위로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저와 가족들도 물론이고요.
마음 디톡스, 나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으로 새롭게 채워 보는 시간
어두움 속에 있던 나에게, 하느님께서는 이미 조용히 오고 계셨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사랑하지 못한 슬픈 날도, 눈물로 고백했던 고해소에서도, 그림책을 읽으며 울컥했던 저녁, 아이들의 웃음을 보며 “너희들이 봄이고 희망이구나.” 하고 중얼거린 그 모든 순간이 제게는 사랑으로의 회기, 정화의 길이었습니다.
마음에도 디톡스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바삐 살다 보면 나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드는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가지요. 눈을 뜰 때부터 밀려 있는 알림과 빨간 숫자, 보고 싶지 않아도 홍수처럼 밀려오는 정보와 이미지들은 몸과 마음이 처리하기 버거울 정도입니다. 더 감당하기 어려워질 때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가 와요. 그런 나를 알아차리는 순간이 다시 새롭게 전환할 기회가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요. 나를 살아 숨 쉬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것으로 새롭게 채워 보는 시간.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고 다시 새롭게 살아가도록요.
우리는 매일 각자의 어두움, 어려움과 아픔 속에서 가만히 사랑을 기다리는 부활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 땅엔 희망이 없는 것 같아 한숨만 나오는 날에도, 기다림에 지쳐 분노할 힘도 남지 않은 무력해지는 날에도, 봄은 언제나 그렇듯 가장 긴 겨울의 외투 끝자락에서 ‘까꿍’ 하고 웃으며 우리 곁에 찾아옵니다.
희망도, 사랑도, 이미 우리 안 어딘가에 숨어 자라고 있었던 것을요. 우리가 느꼈던 간절한 바람, 얕은 걱정과 기다림이 하느님께 이미 가 닿았기 때문일 거예요. 늘 우리보다 먼저, 우리 모르게 와계시는 분이니까요. 일상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사랑과 새로운 희망을 떠올려 봅니다. 초록빛 망토를 입은 어린아이의 해맑은 웃음, 우리를 절대 홀로 두지 않는 그분의 의지를. 저는 다시, 사랑의 자리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