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복음: 루카 1,39-45>
교회가 들려준 대림 제4주일의 복음은 눈으로 보아도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글자 사이의 공간을 뚫고 환희에 찬 음성이 흘러나오는 듯합니다. 아이의 웃음소리와 그 소리를 들은 어머니의 기쁨에 찬 화답이 아직 그 아이를 마주하지도 않은 엘리사벳의 인사로 크게 울립니다. 이 아름다운 만남은 성모님과 엘리사벳 각자의 고난을 배경으로 가집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기쁨이 있습니다. 뜻하지 않게 맞이한 신비로운 아이와 이미 시간이 지난 줄 알았던 몸에 온 놀라운 아이라는 기쁨과 고난이 같이 어우러져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여인은 서로 마주하며 환호합니다. 그리고 태중의 아이들도 자신들의 어머니와 함께 환호합니다. 언젠가 밝은 빛이 드리워진 아름다운 강가에서 다시 만나겠지만, 미리 그 기쁨을 어머니 배 속의 강 속에서 예비합니다.
이렇듯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 이전부터 이어진 요한 세례자와의 인연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우리가 들은 성모님과 엘리사벳의 관계로써 루카 복음서는 하느님께서 보이시고자 하는 구원 계획이 주님의 탄생 이전부터 착실히 준비되고 있었음을 이야기해 주는 듯합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만나 우리가 잘 아는 성모송의 앞부분을 이야기합니다. 엘리사벳의 이 고백을 통해 성모님과 엘리사벳이 만났듯이 그들의 태중에서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께서 만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분은 지나간 계약의 문을 닫고 새로운 계약을 준비하기 위해, 또 다른 한 분은 그 새 계약 자체로서 서로를 만나고 계신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가장 복되신 분이라며 성모님을 칭하고 그 복됨이 태중의 아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자기 태중의 아이가 뛰놀 만큼 자신에게도 당신의 방문은 기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하는 환호는 여러모로 우리들을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의 삶에 수놓아진 환희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엘리사벳의 환호는 우리의 기쁨을 돌아보게 하고, 소리 질러 찾아야 할 것은 이렇듯 숨은 주님이라고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내는 대림 시기는 이 기쁨, 나의 삶에 또 세상 속에 감춰진 주님을 찾아낸 기쁨이어야 합니다. 진짜 왕을 맞이했을 때 터져 나올 그 환희를 위한 전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엘리사벳과 같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미 닫혔다고 생각한 태를 열어 아이를 선물하신 크신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들은 그녀처럼 우리의 이성과 지성 그리고 계획을 뛰어넘으셔서 세상에 이미 오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심과 다시 오심을 찾고 기다려야 합니다.
사실 엘리사벳의 놀라움으로 가득 찬 환호는 이미 준비된 것입니다. 자신에게 놀라운 일을 선사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그녀의 마음을 미리 열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아이인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엘리사벳은 묻지 않습니다. 그저 놀라워하며 기뻐할 뿐입니다. 자신이 믿는 하느님을 다시 찬미할 뿐입니다. 온전한 놀라움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온전히 자기 자신을 맡겨, 의도하지 않은 사건 앞에서 하느님 덕분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잘 보내 온 우리의 대림 시기는 이 기쁨을 맞이할 준비를 온 것입니다. 매번 같은 사건, 항상 같은 전례이지만, 하느님의 육화는 그것을 맞이할 준비가 된 이들에게 늘 기쁨의 환희를 불러일으킵니다. 고난한 이 삶이 주님을 품은 귀한 강이었음을 깨닫게 하기에 우리는 주님의 성탄 앞에서 소리 지르며 환호할 수 있습니다. 나와 같은 땀과 비슷한 웃음, 소리 없는 눈물과 기대를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전하며 우리는 엘리사벳과 함께 기쁨과 놀라움으로 가득 차 소리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