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승복
사랑은 확인되어야 합니다. 드러나지 않은 사랑은 좋은 지향은 될 수 있지만, 신기루에 가깝습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의 사랑이고, 내 자녀도 그렇습니다. 실현된 무언가를 우리는 사랑이라 부릅니다. 하느님의 사랑도 당신의 아드님으로 드러나셨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육화하지 않은 하느님의 사랑은 신화에 머무를 따름입니다. 발설되지 않은 사랑, 실현되지 않은 사랑은 아쉬움은 될 수 있지만 사랑이라 부르기 어렵습니다. 물론 이 사랑이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상대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나를 항상 미지의 영역에 두는 것이기에, 당연하게도 상대의 배척과 거부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야 굴복이나 패배가 아닌 사랑으로 화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해’라고 할 때마다, 내 사랑은 그의 자유로운 처분에 무방비로 노출됩니다.
사랑은 취약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약함은 오히려 사랑의 탁월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검증되고 안전한 것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거래나 계약으로 바꿔 불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당연히 스승을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앞서 생각한 사랑의 속성을 염두에 둔다면, 이 질문에 담긴 기억과 역사를 살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 척하며 스승의 사랑을 외면했습니다. 그는 스승이 걷는 거친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까?
여기에 더 맞는 대답은 ‘사랑이 부족했다’입니다. 그러면 그럴 때, 둘의 사랑에서 누군가의 사랑이 부족하다면 무엇으로 그 사랑을 채울 수 있습니까?
남은 사랑이 그 부족함을 채워, 사랑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닭 울음 성당’이 있습니다. 이곳 지하 경당에는 두 개의 이콘이 있습니다. 제대의 한쪽 면에는 자신의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한 베드로와 슬픈 표정의 예수님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비슷한 구도로 오늘 복음의 장면이 있습니다. 세 번의 부정과 세 번의 고백이 대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패와 사랑의 용기가 서로 대응합니다. 세 번의 부정은 갇힌 예수님을 더욱 어둠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의 사랑 고백은 같은 입에서 나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오늘 복음은 성서의 다른 장면도 기억나게 합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베드로는 장담합니다. 자신은 스승을 배반하지 않겠다며 사랑을 확언합니다. 하지만 스승은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당신을 배신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같은 베드로의 입에서 사랑의 고백이 나옵니다.
이제 스승의 입에서는 베드로의 죽음에 대한 예고가 이어집니다. 당당하게 죽음을 이야기한 베드로는 두려움 앞에서 배신하였고, 슬퍼하며 사랑을 이야기한 베드로는 결국 순교로 사랑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랑이 가진 약함과 강함의 역설이 예수님과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됩니다. 약함 속에서 자리 잡은 사랑의 굳건함이 드러납니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제자의 배신이나, 치기 넘치는 교만에도 흔들리지 않는 예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전합니다. 부족한 베드로의 사랑을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채우십니다. 그 사랑으로 베드로는 세 번의 배신을 넘어, 세 번의 고백으로 다시 사랑을 배웁니다. 베드로의 배신은 스승의 사랑이 드나드는 문이 된 것입니다.
부활 3주일인 오늘, 교회가 들려준 첫째 제자의 약한 사랑이 우리의 용기를 북돋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가야 할 곳을 알려 줍니다.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쟁취한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채워 주신 사랑을 알아듣고 희망하게 합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서서 반복할 배신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채워 주실 사랑을 바라게 합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에 기대도록 이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