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바로 다음 주일에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하느님의 자비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요? 오늘은 이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가톨릭 교회의 성인 성녀 가운데, ‘하느님 자비의 사도’로 불리는 성녀가 있습니다. 바로 폴란드 출신인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입니다. 파우스티나 성녀는 환시 중에 예수님의 가슴에서 피와 물이 빛줄기 형상으로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고 이를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하느님의 자비 성화’). 성녀는 이 그림의 의미에 관해 환시 중에 들은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내 딸아 …… 내 자비에 대하여 세상에 말하여라. 옅은 빛줄기는 영혼을 의롭게 하는 물을 나타내고,
붉은 빛줄기는 영혼의 생명인 피를 의미한다.
이 두 빛줄기는 십자가에서 창에 찔린 내 심장이 열렸을 때, 내 깊은 자비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모든 인류가 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를 깨닫게 하여라.”(‘성녀 파우스티나의 일기’에서)
이처럼 성녀가 본 환시는 온 인류에 대한 예수님의 깊고 넓은 자비가 그분의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도 우리의 영혼이 의롭게 되고,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깊이 머물렀던 파우스티나 성녀는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 자비를 실천하며 살아갈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자비로운 말과 위로를 건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비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자비를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성녀 파우스티나의 일기’ 참조). 이 세 가지 방법 중에서 세 번째가 눈길을 끕니다. 이는 자비로운 말을 건넬 수 없고, 자비로운 행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닮고자 노력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루카가 전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의 이야기에서 자비를 실천하기 위한 이 세 번째 방법의 좋은 모범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 나무를 짊어지고 해골산에 이른 예수님은 다른 두 죄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사형 선고 받기 전에 당한 채찍질로 온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고, 옷은 벗겨진 채로 높은 곳에 매달려 비웃음의 대상이 된, 너무나도 수치스럽고 견디기 힘든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온 삶을 바쳤건만, 그에 대한 대가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이라니. 예수님의 인간적인 마음에는 그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린 채로 힘겨워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을 위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이 말씀보다 더 위대한 ‘자비를 청하는 기도’가 있을까요?
‘자비’(mercy)라는 단어의 어원을 생각해 보면, 루카 복음의 예수님이 보여 주신 자비를 청하는 기도가 지니는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비(mercy)의 어원은 ‘보상’ 혹은 ‘지불’을 의미하는 라틴어 ‘merces’ 또는 ‘mercedis’에서 유래합니다. 즉, 자비에는 보상이나 지불의 개념이 포함되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당신의 생명을 지불하시면서까지 그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고자 하시는 그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자비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돌아보며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자비의 마음에 감사드리면서, 우리도 조금이나마 그러한 자비의 마음을 닮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