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이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이를 살리는 기적을 행했으며, 제자들을 모으고 평화와 사랑을 가르쳤다. 종교 개혁자의 모습도 지녔던 그는 적대 세력에게 고발당해 죽음에 이르렀으나,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부활하여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들은 부활한 그를 자신들이 직접 만졌으며, 그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여러분들은 이 글에서 지칭하는 ‘그’가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당연하게 예수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묘사가 지칭하는 ‘그’는 예수님이 아니라, 소아시아 지역(지금의 튀르키예)의 티아나 출신인 ‘아폴로니우스’(Ἀπολλώνιος)입니다. 소위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라고 불리는 이 사람은 기원후 1세기경에 활동했던 철학자이자 종교 지도자입니다.
필로스트라투스(기원후 170~250년)라는 사람이 남긴 글을 통해 아폴로니우스에 의한 이야기들이 전해지는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아폴로니우스는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삶의 행적과 아주 유사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아폴로니우스가 살았던 당대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많은 사람이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고 전해집니다. 로마 제국의 21대 황제였던 카라칼라(기원후 186~217년)는 카파도키아 티아나에 아폴로니우스의 신전까지 세웠다고 하지요. 아폴로니우스의 많은 기록들이 사라지고 그의 존재 자체가 덜 알려지게 된 이유가 ‘예수님의 라이벌’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을 정도로, 당시에는 그의 추종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였고, 또 수많은 추종자가 있었다고 한다면, 오늘날에는 그 추종자들이 왜 모두 사라졌을까요?
사람들이 아폴로니우스도 예수님처럼 병든 이들을 고치고, 죽은 이들을 되살렸으며 심지어 부활까지 했다고 믿었었는데, 예수님의 존재는 2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많은 이들을 구원으로 이끈 반면에, 왜 그의 존재는 오래된 책 속에서만 발견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오늘, 발칙해 보일 수 있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24,1-12)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이 그 사실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했을 때, 사도들조차도 처음에는 그것을 헛소리로 여기며 믿지 않았다고 전합니다(루카 24,11). 사도들의 이러한 반응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들었던 이들이 가장 먼저 보였던 일반적인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쉽게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음에도, 많은 이가 예수님의 부활을 진리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 온 삶을 투신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답을 한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변화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오늘 제1, 2독서의 주인공인 베드로와 바오로가 있습니다. 이 사도 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선포하기 위해 온 삶을 바쳤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두려움이 가득하고 예수님을 박해하기도 했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는 제자들이 된 것이지요. 아마도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지 못해서 믿기 어려웠던 많은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부활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고 믿고 따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보여 준 변화된 삶의 모습이 예수님의 부활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우리들의 변화된 삶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강력한 힘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기쁨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지 못한다면, 예수님도 아폴로니우스처럼 오래된 책 속에서만 기억되는, 생명력을 잃은 옛 인물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