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세 32,28)

성경 이야기

“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세 32,28)

인간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하느님

2025. 08. 13
읽음 43

5

4

 

이름을 짓는다는 것

 

고대 근동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이름은 존재의 본질과 운명, 사회적 역할과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고 현실과 운명을 창조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름과 관련된 예화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창세 2,4-25의 이야기에서 모든 동물과 새가 아담 앞으로 끌려와 아담이 각자의 이름으로 그들을 부르지만,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몸에서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녀에게도 이름을 지어 줍니다(창세 2,23 “여자라 불리리라”). 또한 창세기 17장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라이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사라로 바꾸시며 새로운 소명을 주십니다.

 


 

야곱이 기도하

 

이제 여기, 위기를 겪은 후에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와 민족을 나타내는 이름을 얻게 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창세기 27장에서 형 에사우의 복을 가로챈 야곱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빈손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지금, 그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31,3).

 

지난 20년 동안 야곱은 일가를 이루고 수많은 양과 염소, 여종과 남종, 낙타와 나귀들을 거느리는 부자가 되었습니다(30,43). 그러나 야곱에게 형 에사우는 여전히 두려운 존재고, 그와의 관계는 불안합니다. 야곱은 에사우와의 만남을 앞두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저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저의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 ‘너의 고향으로, 너의 친족에게 돌아가거라. 내가 너에게 잘해 주겠다.’ 하고 저에게 약속하신 주님! …… 당신께서는 내가 너에게 잘해 주고, 네 후손을 너무 많아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처럼 만들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32,10-13)

 

앞의 5절과 6절에서는 야곱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 반면, 이 기도는 하느님께 초점을 맞추면서 시작하고(32,10) 끝마칩니다(32,13). 야곱은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자신과 연결함으로써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내린 명령과 약속을 기억하면서 하느님과 자신을 아주 구체적인 관계 속에 둡니다. 야곱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의 수혜자이며, 자신은 그 약속에 따라 행동했다고 단언합니다.

 

기도의 시작에서 야곱은 에사우를 만나면서 직면할 위기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나게 될 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충실함과 성실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11절에서 야곱은 자격 없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과거에 베푸셨던 선하심을 상기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기도에서 자신의 운명이 역전된 것에 대해 감탄합니다. 예전의 그는 절망적이고 가난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의 야곱은 부유하고 강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자신 안에 없음을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얻은 모든 것은 하느님의 행동을 통해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야곱은 제 형의 손에서, 에사우의 손에서 부디 저를 구해 주십시오라고 자신의 절박함을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32,12). 야곱은 400명의 부하를 데리고 자신을 만나러 오는 에사우의 모습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며(32,12), 에사우의 적대감은 야곱의 모든 것을 파괴할 수도 있음을 두려워합니다.

 

줄곧 에사우는 아버지가 야곱에게 해 준 축복 때문에 야곱에게 앙심을 품었었고 동생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27,41). 그러나 에사우의 계획은 야곱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야곱에게 하셨던 내가 너에게 잘해 주고, 네 후손을 너무 많아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처럼 만들어 주겠다”(32,13; 28,13-14)는 약속과 충돌하기 때문에 에사우는 하느님의 반대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야곱이 처한 이 위험에서 그를 안전하게 보호해야만 당신께서 야곱과 그의 선조들에게 약속한 미래가 지켜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야곱이 한 말의 그 어떤 부분도 긍정하거나 부정하면서 직접적으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야곱에게 깊은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느님과 겨루는 자

 

야곱은 과거에 하느님께 한 약속을 상기시키고, 안전한 미래를 간구한 후에 그저 앉아서 사건이 전개되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는 형 에사우에게 줄 선물을 골라서 자신보다 먼저 앞서가게 하였습니다(32,14-21). 그리고 밤에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을 야뽁강 건너편으로 건네 보냈습니다(32,23-24). 이제 야곱은 혼자 남았습니다.

 

이때 야곱은 예상치 못한 만남을 마주하게 됩니다. 과거 그는 약속의 땅을 떠나 도망치던 밤에 하느님의 집이라고 알려진 베텔에서 어떤 낯선 존재를 만났습니다. 낯선 존재는 곧 하느님이며 베텔은 앞으로 프니엘(“하느님의 얼굴”)이라고 불릴 곳입니다(28,10-22).

 

베텔에서의 첫 번째 만남은 하느님의 지원과 보호, 안전한 귀환 약속 등 신비로움이 가득했지만, 이번 만남은 불길한 어조로 뒤덮여 있습니다.

 

깊은 밤에 상대방의 이름을 알지 못하거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은 공포심을 고조시킵니다. 야곱이 누구를 만났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너무 간결한 문장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32,25)로 시작합니다. 이제 야곱은 숨겨져 있고 알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해야 합니다. 씨름은 밤새도록 지속되었습니다(32,25-26). 이 낯선 사람은 야곱을 해칠 힘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야곱을 해치지는 못합니다. 야곱은 그를 끝까지 놓아주지 않습니다.

 


 

이름이 무엇이냐?

 

이 씨름꾼들은 오랜 몸싸움으로 지쳤습니다. 32,27-30에는 세 번의 놀라운 대화가 있습니다. 이제 신체적 전투에서 언어적 전투로 전환됩니다.

 

낯선 사람: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다오.”

야곱: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낯선 사람: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 야곱입니다.”

낯선 사람: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야곱: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낯선 사람:내 이름은 무엇 때문에 물어보느냐?”

 

질문과 응답으로 이루어진 대화가 경쟁적으로 이어집니다. 상대방은 야곱에게 자신을 풀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몸싸움에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자신을 축복하지 않는 한 그를 놓아주려 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이름에 대한 질문에 야곱이라고 대답했을 때 낯선 사람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꿉니다.

 

야곱은 하느님하고만 씨름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었습니다” (32,29). 야곱은 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경쟁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야곱은 에사우와는 장자권을 놓고 씨름합니다(25,29-34). 그는 어머니 레베카의 권유와 계획에 따라, 죽어 가는 아버지가 택한 아들에게 베푸는 마지막 축복을 놓고 아버지와 씨름합니다(27,1-29). 그는 심지어 사랑하는 라헬과 아들의 탄생을 놓고도 씨름합니다(30,1-24). 그는 라반과의 관계에서도 주도권을 잡으려고 경쟁합니다(30,25-31,54).

 

결국 주변 모든 사람과 투쟁하는 야곱의 삶은 곧 하느님에게로 확장된 투쟁의 삶이기도 했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야곱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특징짓고 변화시킵니다.

 

이제 하느님과의 씨름을 통해 그는 새로운 축복을 구했고 그가 얻은 것은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태어날 때 형의 발꿈치를 붙잡은 그의 독특한 행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25,26). “발꿈치를 잡다라는 히브리어 동사(ʻqb)속이다라는 뜻도 가집니다(27,36). 이제 더 이상 야곱은 "발꿈치를 잡는 자”, “속이는 자가 아니라, “하느님과 겨루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어원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아마도 하느님이 다스리신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적합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원이 무엇이든 야곱은 새로운 이름으로 불릴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마주하며 축복을 얻었고, 이름이 바뀐 사람입니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약함과 이스라엘의 강함의 대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통치하시고 인류가 순종하는 다른 모든 관계와는 달리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함께 승리한 것입니다. 그는 이제 변화된 모습으로 형 에사우에게 다가갈 것입니다.

 


 

야곱의 하느님

 

이제 야곱은 낯선 사람의 이름을 알고 싶어 합니다(32,30). 하지만 그는 야곱의 요청에 응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한밤의 씨름으로 많은 것을 얻었지만 낯선 이의 이름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6절에서 야곱이 요청했던 축복은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 낯선 사람은 떠납니다. 그가 자유롭게 떠났는지, 아니면 야곱이 떠나도록 허락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으로 남아 있고 그분의 숨겨진 것은 그대로 숨겨져 있습니다. 야곱은 간절히 원했던 축복을 받았고, 더 이상 과거의 야곱이 아닙니다. 그는 축복받은 절름발이입니다(32,30.32).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야곱이 하느님을 만난 이 사건은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직접 만난 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사람의 대비는 두드러집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 이사악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엄청난 요구에 전적으로 복종합니다. 반면 위기 속에서 야곱은 자신의 삶 전체를 특징짓는 투쟁을 계속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며,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독특한 방식으로 야곱에게 접근하십니다. 그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뵈었지만”(32,31), 이 만남이 사람을 상처 없이 그대로 둔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하느님을 보고도 살아남았지만, 앞으로도 새로운 힘과 절뚝거리는 약함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야곱과의 씨름에서 열세에 몰리고, 그의 다리를 절뚝거리게 만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은 숨기면서 위기에 빠진 인간에게 새 이름을 주고 축복해 주는 이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순한 복종이나 순응이 아니라, 끊임없는 씨름과 투쟁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씨름을 통해 인간을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Profile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성경 공부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기도 하지만, 내 자신이 누구인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 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가게 합니다. 저에게 성경은 무한히 펼쳐진 우주와 같습니다. 그 안에서 끊임없는 질문을 만나며, 그 모든 답이 하나로 이어지는 신비로운 여정을 떠나는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다른 분들이 함께 본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