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의 목소리
말은 소통의 도구입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관계 맺음을 전제로 합니다. 인간이 하는 발전된 언어만이 아니라, 피조물 모두는 다양한 몸짓과 소리로 말합니다. 나를 넘어서 너의 영역으로 가는 것이 우리가 하는 말의 근원적인 속성입니다.
따라서 소통은 말의 기본 원리이며 목적입니다. 관계 맺음은 말의 당연한 결과물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말은 친교를 드러내는 열매입니다. 인간이 하는 말은 모든 피조물의 다양한 소리와 몸짓이 지향하는 친교를 응축하여 드러냅니다. 이 의미를 우리는 신앙을 담아 ‘사랑’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내가 하는 말은 ‘나’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바라는 것, 희망하는 것이 나의 언어로 드러나며 확인됩니다. 내 앞에 있는 너에 대한 기대, 그와 맺기를 바라는 친교와 공감이 내가 하는 말로 증명됩니다. 그러니 말은 소리를 넘어, 품어 온 지향과 살아온 흔적, 바라는 것들의 종합입니다.
모든 나의 역사가 ‘너’의 앞에, 말을 통해 놓이는 것입니다. 마치 나를 내어놓듯, 말은 나를 담아 너에게 전해 줍니다. 관계 맺고자 하는 원의, 사랑이 말을 가능하게 하며, 그 사랑을 확인합니다.
한편으로 이와 다른 말들도 있습니다. 사실 ‘말’보다는 ‘소음’이라 불러야 합니다.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의 세계’라는 저서에서 이를 ‘잡음어’라고 불렀습니다. 기억이나 역사, 바람과 희생 또 사랑이 생략된, 자신으로만 가득한 잡음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 지속되면 오히려 소통을 막습니다.
소통이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에만 몰두하기에 이 말은 비어 있습니다. 자신을 확장시키는 것에만 그 목적이 있기에 이 잡음은 어떤 것도 소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들은 의미 없이 반복적으로 울리는 기계음보다도 못합니다. 잘 작동하는 기계는 그것의 정직함을 소리로 드러내지만, 이 잡음은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봐 줘. 나를 만족시켜 줘’라는 자신의 욕구에만 정직합니다. 대화를 나누는 상대를 욕구의 대상으로만 소진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 잡음은 소통을 막고, 생존을 위해 싸우게 합니다. 채워질 수 없는 서로의 욕망을 끄집어내어 끝없이 싸우게 합니다.
속이 빈 말이 넘쳐날수록 우리는 좌절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 자체에 회의를 품게 됩니다. 소통도 변화도 불가능하다는 체념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 두려움과 경계가 자리 잡습니다. 이렇듯 소리뿐인 말은 사랑을 포기합니다. 삶이 아닌 생존만을 바라게 합니다. 말이 가져야 하는 친교, ‘사랑’이 사라지니 잡음이 될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양 떼의 예를 들어 당신과 우리들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는 이 말씀으로 말이 가진 사랑의 원리를 확인하십니다. 우리를 가능하게 한 것도 사랑이고, 향하는 것도 사랑이니 그 여정 중에 들리는 주님의 말도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듣는 것은 주님께서 속삭이시는 사랑입니다. 나의 이기심을 넘어 사랑하도록, 진정으로 말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말씀이시고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 진정한 ‘말’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주인의 목소리는 바로 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음성에 기대어 우리도 제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말이 잡음으로 바뀌어 갈 때에, 주님의 음성에 따라 나를 다잡아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넘쳐나는 세상의 잡음 속에서, 그들 자신조차 모르는 친교와 사랑의 갈망을 짚어 줄 수 있습니다. 말이 가진 원래의 역할인 친교와 사랑을 신앙의 이름으로 들려줄 수 있습니다.
오직 목자의 음성에 화답할 때만이 우리의 노래가 가능합니다. 세상의 피조물이 자신들의 음성으로 창조주를 찬미하듯이, 우리가 하는 사랑의 말도 그러해야 합니다. 목자의 음성에 맞춘 우리의 노래는 같은 사랑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