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낭만, 프란치스코 성인이 가르쳐 준 삶

영성과 신심

그리스도인의 낭만, 프란치스코 성인이 가르쳐 준 삶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2025. 0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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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상대방의 습관이나 취향 따위를 닮는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쩌면 나와 그의 인연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이런 말로 시작하는 이유가 있다. 긴 청춘의 한 막을 함께한 그가 가장 사랑한 가톨릭 성인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였기 때문이다. 그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그 삶까지 본받고 싶어 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추천한 책 헤르만 헤세의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처음 마주했다. 그리고 이제 내가 프란치스코 성인을, 그리고 성인의 삶을 애정한다.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젊은 나날을 즐겼다. 그러던 중 기사의 꿈을 품고 전장에 나섰고, 가혹한 포로 생활과 병마를 겪으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그 후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기 재산을 아낌없이 내어 주었고, 기도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그를 부르는 신비로운 음성을 들었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무너져 가는 나의 집을 다시 세워라.”

 

그는 이 말씀이 눈앞에 허물어진 성당을 뜻한다고 여기고, 아버지의 재산으로 성당을 보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아버지 앞에서 세상의 모든 유산을 내려놓고, 오직 하느님만을 아버지라 부르겠노라 선언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의 부와 영광을 좇지 않았으며,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 10, 9-10)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미사 드리던 어느 날,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복음대로 살기로 결심했다. 가장 검소한 옷을 걸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갔다. 그의 삶을 따르는 제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마침내 1209,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탄생했다. 수도자들은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했다. 이어 클라라 수도회가 설립되었으며, 평신도들을 위한 제3회도 생겨났다.

 

1224, 깊은 기도 중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았다. 하느님을 향한 끝없는 사랑과 순종을 몸으로 증명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후 그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자매처럼 다정한 것이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통해 우리는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삶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삶은 오늘날에도 세상의 물질과 욕망을 떠날 때 비로소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리스도인의 낭만은 무엇인가

나는 낭만을 갈구하던 사람이었다. ‘이방인이나 나그네같은 단어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대부분 같은 교육 과정을 밟고, 친구도 입시 경쟁자가 된다. 그뿐인가, 대학을 진학하고 졸업하여 취업해야만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하는 사회적 가치관에 나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무렵, 나는 사회가 만들어 둔 틀에서 이탈하고 싶어졌다.

 

그때부터 낭만을 더욱 열망했다. 하지만, 이 낭만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정의하지는 못했다. 막연하게 여행기를 쓰는 작가가 되겠다며 자퇴를 고심한 정도였다. 결국 사회가 정해둔 길을 택하였고, 여느 학생들처럼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으며, 대학에 진학하고 취업을 위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스스로 의문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은 무엇인가?” 끊임없는 물음 끝에 결국 휴학과 자퇴를 하고, 신학과에 진학했다. 그저 하느님의 도구가 되겠다는 신념 하나로 말이다. 그리고 신학과에 재학하며 그리스도인의 낭만을 만났다. 낭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으나, 내 시선에는 그러했으므로 낭만이라 명명하겠다.

 

특히, 청춘의 한 막을 함께한 그를 통해 나는 그리스도인의 낭만을 경험할 수 있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따르던 그와 보낸 시간 속에서 말이다. 학기 중의 아침이면, 교리 신학원에서 미사를 함께 드리거나 마주 앉고 더듬거리며 성무일도를 바쳤다. 하루를 주님 안에서 시작한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평온해지기도 했다. 어떤 날에는 목적지도 없이 몇 시간이고 거리를 거닐거나 한강 공원을 따라 걸었다. 그 시간에 우리는 수업 시간 · 철학 동아리(철학 동우회) 시간 · 신학 동아리(가톨릭 신학 연구회) 시간을 통해 배우고 생각한 것을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단순한 사유에 머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진리이며 사랑이신데, 우리는 그분 안에서 어떻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함께 고민하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는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삶을 배우고 있었다.

 

사진 ⓒ 김윤우.

 

그렇게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는 가난했으나 풍요로웠고, 철저히 낮아졌으나 드높았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낭만이 아니겠는가. 세상의 기대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의탁하는 삶.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하느님을 향해 있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삶. 되돌아보니, 내가 정의하지 못했던 낭만은 이러한 삶이었다.

 

물론 궁극적으로 갈구하면서도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때로는 하느님께 의탁하는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해도, 현실적인 것에 부딪힐 것이다. 또 사회의 기준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순간이 있을 때마다,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앞으로 나는 하느님께 의탁하는 삶이란 과연 무엇일지 끝없이 고찰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긴다는 것은 삶 속에서 끊임없이 신뢰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주님, 당신의 자녀가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언제나 몇 번이고, 돌아온 탕자를 안아주십니까? 당신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누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바라보며, 성인의 발걸음을 좇아보는 것이 곧 당신을 닮을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를 위한 당신의 계획이셨기를 바라봅니다. 제게, 당신과 닿은 삶을 살도록 도와주소서. 아버지 당신께 찬미 노래 부르며 제 두 무릎을 꿇습니다.”

 


참고 자료

  • 《가톨릭 성인전》, 가톨릭출판사
  • 헤르만 헤세,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Profile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도보 여행을 하다 보면 때로는 예상치 못한 만남을 경험합니다. 길가에 피어난 작은 생명, 끝없이 출렁이는 바다, 광활한 하늘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고, 저를 주님께로 이끌어 줍니다. 혼자 떠나는 길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바라보는 경이로운 순례입니다. 길 위에서 마주하는 삶의 조각들 속에서 발견하는 은총이 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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