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주님을 만난 이들: 요한 복음 속 이야기> 시리즈의 아티클로 “신앙생활에도 슬럼프가 오나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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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는 누구보다 뜨겁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점차 의문과 흔들림 속에서, 주님의 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앞에서 토마스는 깊은 의심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공동체를 떠나지 않았고, 여전히 주님의 상처를 만지고 싶어 할 만큼 그분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던 토마스는 어떻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을까요? |
토마스, 누구보다 뜨거웠던 사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이가 앓고 있다는 마리아의 요청을 들으시고, 이미 죽은 라자로를 살리기 위해 유다 지방 베타니아로 간다고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신다. 토마스는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한 11,11)
하지만 제자들은 바로 이전에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 했다는 사실(요한 10,39)을 상기하며 예수님을 말리려 한다. 그 앞에서 토마스가 요한 복음에서 처음으로 다음과 같이 입을 연다.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이 얼마나 충직한 발언인가. 한마디에 그의 성격과 열정이 충분히 묻어나온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매우 믿음직한 발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말에는 우리가 놓치기 쉬운 몇 가지 생각할 점이 있다.
첫째, 이 말은 예수님께서 바로 직전에 하신 말씀에 드러나는 내용, 곧 당신이 유다로 향하시는 실제 이유와 어울리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사실 방금 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요한 11,15)
예수님께서 라자로에게 가시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제자들을 믿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토마스는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는 여기서 한편으로는 그의 몰이해를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놀랍게도 첫 등장부터 이미 믿음의 주제가 드러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이 말은 실제로 라자로를 살리시려는 예수님의 의도와 어긋난다. 예수님께서는 어디까지나 생명을 전하러 가시는 것이지, 죽음을 맞이하러 가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사실상 죽음에서 생명이 피어나는 기쁜 일을 보러 가는 중이지만, 토마스는 반대로 죽음이라는 슬픈 사건이 일어날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주님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열정만큼은 누구보다 뜨거운 신앙인의 모습이다.
위대한 계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토마스는 이후 14장에서 다시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고별 담화를 하신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께로 먼저 가실 것을 예고하시며 제자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놓겠다고 하신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미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자(14,1-4), 토마스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이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토마스는 이에 조심스럽게 의문을 드러낸다. 시간이 지날수록 토마스의 마음속 의구심은 더욱 커져 간다. 처음에 호기롭게 주님과 함께 목숨을 바치겠다고 공언했던 그의 뜨거움이 조금은 식은 듯 느껴지기도 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곧 길임을 명확히 밝히시며,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위대한 계시를 선포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에 관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향하는 사람을 벗어나지 않게 해주시는 길이라고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수님만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고, 이 길은 목적지와 절대 분리될 수 없기에 당신 자신이 목적이자 길일 수 있다고 하였다.
진리를 알아보는 자와 알아보지 못하는 자
사실 유일한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은 요한 복음에 많이 등장하는데, 사마리아 여인(요한 4,25), 태생 소경(요한 9,36), 그리고 앞서 살펴본 필립보 사도도 마찬가지였다(요한 14,8). 이후에 빌라도도 진리이신 예수님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그분께 다음과 같이 묻는다.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8)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간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이를 극복하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는지(사마리아 여인, 태생 소경, 필립보 등), 아니면 그 한계에 머물러 그분을 알아보는 데 결국 실패하는지(빌라도)이다. 토마스는 바로 이러한 갈림길 위에 있으며, 그는 이 인간적 한계를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된 것이다.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이윽고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수난하시고, 끝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일까지 벌어졌다. 토마스는 그동안 어디에 있었을까? 처음에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공언했던 그였지만, 무슨 이유인지 이 긴 수난 사화 동안 그의 행적은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이후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만, 어찌 된 일인지 토마스는 이때에도 자리에 없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요한 20,24)
사실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등장한 첫 모임에 왜 자리하지 않았는지 복음은 명확히 밝혀주지 않는다. 예수님을 향한 신앙이 더 식은 것일까? 아니면 주님과 함께 죽겠다고 호기롭게 공언했던 자신이 그분의 수난 앞에서 숨어버린 것이 부끄러웠던 것일까?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였을까? 어느 쪽이든 그가 예수님을 향한 신앙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요한 20,25)
여기에서 쓰인 그리스어 구문(~라면,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ἐὰν μὴ ~ οὐ μή)은 매우 큰 확신에 찼을 때 하는 부정 표현으로, 그가 예수님의 상처를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절대 믿지 못할 것이라는 강한 어조를 담고 있다.
사실 요한 복음에서 의심과 불신앙은 토마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다. 다른 제자들도 이 점에서 자유롭지 않은데, 토마스의 이 표현이 워낙 강렬하다 보니 그 모든 것을 가려버린 셈이다. 한편 이 표현은 오래 전 왕실 관리 앞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토마스의 “크레도Credo”
예수님의 발언에 안타까움이 묻어나 있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왕실 관리가 결국 예수님을 온전히 믿었듯이, 토마스에게도 아직 충분한 기회가 있다. 왜 그럴까? 매우 미세한 지점이지만, 우리는 토마스의 발언에서 묻어나는 그의 미묘한 심리를 읽어 낼 수 있다. 우리가 토마스의 발언에서 놓치기 쉬운 점은 그가 결국 예수님의 상처를 손으로 직접 만지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1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요한 20,25)
그분을 내심 사랑하지 않고서야 하기 힘든 발언이다.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앉았던 사랑받는 제자처럼(요한 13,23 참조), 토마스는 여전히 예수님을 그리워한다.
그가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동체를 떠나지 않고 다시 그 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요한 20,26 참조). 예수님께서는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스가 원했던 바를 그대로 하도록 이끄시며 그에게 믿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결국 토마스는 주님을 향한 그리움과 사랑 덕분에, 마음속에 자리했던 모든 의혹에서 벗어나 순수한 신앙을 되찾는다. 그리고 복음서 어디에서도, 그 누구도 예수님께 직접 건네지 못했던 신앙 고백을 드린다.2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놀라운 발언, 그 어떤 신앙 고백문보다도 뛰어난 한마디의 크레도(Credo, 신앙 고백). 교회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 교리를 선언할 때까지 얼마나 오랜 아픔을 겪었는지를 생각하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 토마스의 고백은 바로 요한 복음의 첫머리를 아우르는 신비로운 신앙이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1.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앉은 사랑받는 제자가 그러하다.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감은 요한 복음에서 꽤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요소 중 하나이다(요한 13,23). 공관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 유다가 입 맞추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마태 26,48; 마르 14,45; 루카 22,47-48). 이처럼 나쁜 의도를 품었음에도 유다 이스카리옷은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며, 공관 복음서와는 다르게(마태 26,25) 예수님께 직접 건네는 말 역시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2.토마스는 처음에 의혹을 품었으나 그분의 놀라운 신적 통찰력을 보고 믿음의 길을 걸어간 나타나엘(1,45-51)과,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결국 예수님의 수난 때에 나약함을 드러낸 베드로(13,37; 18,17)에게 비견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토마스가 보이는 여러 특징은 토마스만의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모습을 어느 정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결국 토마스는 처음에 호기롭게 품었던 신앙이 점차 식어 신앙의 메마름을 겪게 되었지만, 종국에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신앙을 가지게 된 셈이다. 이는 비록 겉으로는 슬픔과 의혹이 뒤덮여 있었을지라도 그 마음 한편에는 주님을 향한 그리움과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의 신앙인에게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된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예수님을 직접 뵙고, 그분의 육성을 귀로 듣고, 그분을 직접 만졌던 이는 극소수이다. 후대에 태어날 사람들은 오로지 사도들로부터 이어져 온 증언과 전승을 토대로 그분을 알고 체험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뵌 제자들과 함께 없었던 토마스의 처지는, 육안으로 직접 예수님을 뵙지 못한 우리의 처지와 닮았다. 하지만 우리는 불행하지 않다. 그분을 직접 뵐 수는 없어도 그분을 믿을 수 있는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
갓난아기가 부모의 마음을 알지 못해도 부모가 자신을 보호해 줄 존재라는 사실을 굳게 믿듯이, 이러한 믿음은 더욱 순수한 믿음이자 사랑이 묻어나는 믿음이 되어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린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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