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묵주 기도, 순례자의 나침반> 시리즈의 아티클로, '빛의 신비, 그리스도 우리의 빛'과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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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여정 가이드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님께서는 예수님의 순례를 바라보며 고통의 진정한 의미를 바라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고통은 하느님의 사랑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필리 2,8)
고통의 신비는 신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다시 생생하게 체험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알고, 생명을 주는 그 모든 힘을 깨닫도록 이끌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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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탓에 참을 수 없는 비명을 질러대는 물리적인 고통. 사랑하기 때문에 삭히고 참아 내는 인내의 고통. 미움과 분노로 똘똘 뭉쳐 복수하지 못했다는 억울함에 느끼는 울분의 고통. 콕콕 찌르는 양심의 가책으로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참회의 고통. 이처럼 고통의 종류는 여러 가지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다양한 고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배반하고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베드로의 눈물, 그런 베드로를 바라보시고 안타까워하시고 괜찮다는 눈빛을 보내시는 예수님의 고통이 있습니다(루카 22,54-62 참조).
똑같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고통을 경험하지만, 예수님의 고통과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만 집중하며 당하는 좌도의 고통, 잘못을 뉘우치며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우도의 고통이 있습니다(루카 23,39-43 참조). 이처럼 같은 상황에서도 고통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더 나아가 인간과 하느님의 고통이 다르고, 지상과 천국의 고통이 다릅니다. 죽음으로 내몰리는 고통이 있고 사랑을 선포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겪는 고통은 어떤 고통일까요?
고뇌와 수난, 희생과 사랑의 여정
이제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고통의 순례를 떠나십니다.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내어 주셨던 사랑의 만찬을 끝으로 수난과 고통의 여정, 곧 십자가의 길이 시작됩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 보셨습니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여정을 우리는 그분과 함께, 그분을 바라보며 묵묵히 걸어 보고자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우리에게 고통과 죽음이 하느님 사랑을 깨닫게 해 주는 계시의 절정이며 우리 구원의 원천임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묵주를 매만지며 떠나려고 하는 이 순례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줍니다.
고민과 고뇌, 하느님의 사랑 찾기
첫 여정은 올리브산의 겟세마니에서 피땀을 흘리며 아파하셨던 예수님의 깊은 번민과 고뇌의 모습입니다(루카 22,39-46).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고통과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지만, 우리는 고통과 죽음의 순간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번민과 고뇌에 아파하십니다.
상상해 봅시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 고통이 두려워 유다의 배신을 폭로하셨다면, 제자들의 도망과 배반을 막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당신에게 폭력을 쓰는 자들을 더 큰 폭력으로 제압하셨다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아버지께 하늘의 군대를 보내어 달라고 청하였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매 맞고 조롱당하시는 그 순간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기적을 일으키셨다면,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뛰어내리셨다면 어땠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러셨다면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분을 추앙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분이 힘 한 번 쓰지 않고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이신 구세주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럴 능력과 힘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여정도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는 고민과 고뇌에서 시작합니다. 그 고민과 고뇌는 우리를 더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길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루카 22,40)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 고뇌와 고민은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으로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그 고통은 나를 위한 희생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위한,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한 희생과 인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인내
다음의 여정에서 예수님의 순종은 그대로 드러납니다.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습니다.”(마태 27,26)
채찍 끝에 쇠가 달린 무시무시한 폭력이 예수님의 살을 파고듭니다.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몸을 가눌 수조차 없습니다. 인간의 잔혹함은 약자와 무기력한 이에게 더욱 가혹합니다.
“군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습니다.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조롱하였습니다.”(마태 27,29)
“호산나”라고 외치던 군중의 환호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비난으로 바뀌었습니다. 침을 뱉고 비난하며 돌을 집어던지는 야유와 조롱이 피 흘린 상처에 와닿아 더욱 쓰라리고 고통스럽습니다. 누구를 위한 고통과 수난인데, 이 억울함을 알아주는 이는 오래전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를 장식한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요한 19,19)라는 조롱에는 진정한 인류를 위한 예언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짊어지셨던 그 십자가는 100~150kg 정도의 무게였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저지른 죄의 무게, 감당할 수 없는 무거움을 묵묵히 짊어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가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차가운 쇠못이 살을 파고드는 그 고통과 아픔을, 죽음의 두려움을 그분께서는 감당하셨습니다. 그 인내의 근원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4-7)
참는다는 것은 분노를 그냥 안으로 억누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분을 억누르는 것은 자신을 향한 폭력일 수 있으며, 언제든지 밖으로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인내는 남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바탕으로 순종할 때 진정한 것이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과 믿음, 그리고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으로 참고 기다리며 견뎌 내신 겁니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의 마지막에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하며 기도하시고 용서를 청하십니다.
고통 앞에서 외면하지 않으신 성모님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수난의 여정에 성모님은 어디에 계셨을까요? 언제나 그분의 발치에서 성모님은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니에서 피땀을 흘리며 고뇌하시는 예수님의 곁에서부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모든 고통의 순간에 함께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식을 위해서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무거운 십자가를 기꺼이 지시는 어머니입니다. 피투성이가 된 자식의 얼굴을 감싸안으시며 통곡하는 어머니이십니다.
성모님의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보다 적었을까요? 아니요. 예수님께서 감수하셨던 그 고통을 성모님께서도 함께 느끼고 감수하며 묵묵히 그 길을 따라 걷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 고통과 두려움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하느님께서 이루실 당신의 영광을 희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묵묵히 그 길을 따라 걷고 계십니다.
고통과 죽음은 우리의 삶 속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고통과 죽음을 피할 수 있도록, 조금만 덜 아프지 않도록 가장 처참하고 고통스럽게 돌아가셨던,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이보다 더한 역설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고통을 없애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죽음이 지배하는 이 세상 안에 영원한 행복과 생명이 감추어져 있음을 알려 주시고 그 신비를 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과 평화를 찾아 세상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지금 여기’ 고통의 삶으로 향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고통의 삶 속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사랑을 위해 기꺼이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 고통이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순례를 걷는 우리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시신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