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에서 유명한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특히 루카 복음서 15장 전체는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연속적으로 전해 주면서 자비를 통해 드러나는 기쁨에 대해 알려 주고 있습니다. 잃었던 내 양을 찾아 기뻐하고, 잃었던 은전을 찾아 기뻐하며, 잃었던 아들을 찾아 즐기고 기뻐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찾은 사람의 기쁨입니다. 잃었던 양과 아들의 기쁨이 아닙니다. 결국 루카는 찾은 사람의 기쁨을 통해 죄인의 회개를 원하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시작은 불평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이 죄인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먹는다고 투덜거립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죄인들이 회개했음에 기뻐하기보다는 먼저 그들을 비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비하하기보다는 그들이 회개하였다는 기쁨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한쪽은 사랑의 눈길이지만, 한쪽은 정죄의 눈길입니다. 사랑은 기쁨을, 정죄는 불평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고 회개하기를 바란다는 의지를 드러내셨고(에제 18,32),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에제 33,11)
그러나 누구보다 하느님을 잘 알고 연구한다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회개의 길을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자신만을 사랑하는 우월감에 빠져 있습니다. 마치 되찾은 아들의 비유 이야기 속 큰아들 같습니다. 되찾은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큰아들 말입니다.
작은아들은 어떤가요?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유산을 받아 아버지를 떠납니다. 아버지를 떠날 때, 아들은 기뻤을 것입니다. 이는 제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방종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관계적 기쁨이 아니라 자아도취에서 오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작은아들은 재산을 탕진했고, 공허함에 빠지게 됩니다. 그 공허함이 어떤 것인지 루카는 너무나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작은아들은 제 곁에 아무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고, 자신을 받아 줄 이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평화와 안정적 삶이 지속될 때는 하느님이 필요 없게 느껴집니다. 현재 내가 누리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질 뿐입니다. 작은아들이 재산을 탕진하며 놀 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위기가 오면 내가 누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중요해집니다. 이때 신앙은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하느님께 돌아가면 희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 다시 기쁨을 찾았듯이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어떻게 바라보았고, 어떻게 반겨 줬는지 말입니다.
아버지는 멀리서 오는 아들을 한눈에 알아봅니다. 그리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와 안정적 삶 속에서 당신을 저버리고 살았던 지난날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가엾은 마음과 다시 돌아왔다는 기쁨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십니다. 또한 아버지는 모든 재산을 탕진한, 죄지은 아들을 용서해 주시고 다시 아들로 받아 주시어 큰 잔치를 베푸십니다. 아들의 회개보다 아버지의 기쁨이 더 큽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더 크게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사랑보다는 큰아들의 냉정함을 추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1코린 8,1). 이제 주님이 먼저 베푸신 사랑과 기쁨 속에서 좀 더 사랑의 가르침을 알고 실천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