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절한 말 한마디로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속담입니다. 삶에서 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독서에서도 “나무의 열매가 재배 과정을 드러내듯이 사람의 말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낸다.”(집회 27,6)라고 하며, ‘말은 내면의 거울’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또한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속담처럼 큰 파급력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말’에 대한 관점에서 본다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변을 살펴보면 긍정적인 말보다는 배타적인 말, 심판하는 말이 더 많이 들립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덮어 주고 사랑을 전하는 말 대신 배척하고 혐오하며 단죄하는 말들이 많이 들립니다. 배타적이며 단죄하는 말들은 처음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갈수록 자신의 품격을 떨어트립니다. 이 카타르시스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생기는 것인데, 이 상태가 되면 배타적이고 단죄하는 말을 끊을 수 없게 되지요. 점점 고립되고 배척되는데도 말입니다.
식물이 자라는 두 개의 화분을 놓고 한쪽은 긍정적인 말, 한쪽은 부정적인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긍정의 말을 들은 식물은 잘 자라지만, 부정의 말을 들은 식물의 성장 속도는 더딥니다. 이처럼 말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도 ‘빛이 생겨라’ 하고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실 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말씀을 통해 치유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마태 9,1-8).
전례 때 외치는 신앙 고백은 깊은 의미와 우리 삶의 지향을 담고 있습니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라고 외치는 참회의 말과 이어지는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는 고백 속에는 내가 비록 죄를 지었지만, 주님의 자비 덕분에 용서받았다는 신앙의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성찬 제정과 축성문 다음에 바치는 “신앙의 신비여”라는 사제의 고백은 성체와 성혈로 변화된 이 순간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 신비를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신비에 우리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다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부활의 증거자로서 사는 것이 중요하지요.
사도 신경을 통한 신앙 고백은 우리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마음에 새겨야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많은 분들이 조건 반사적으로 신앙 고백을 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우리가 신앙적 말을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성경을 읽어야 하지요.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는 복음 말씀처럼 성경을 읽고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서 그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넘쳐야 입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번 한 주 전례 때 외치는 말들과 성경의 말씀들이 신앙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묵상해 보며, 조건 반사적으로 신앙 고백을 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 깊은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긍정적이며 사랑을 드러내는 신앙의 말들을 삶 속에서 많이 외칠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