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성경에서 만난 나의 하느님> 시리즈의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에서 이어집니다.
혹시 깊은 절망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있나요? 다시는 회복될 수 없다고 느꼈을 때, 뜻밖의 모습으로 다가오신 하느님을 만나 본 적이 있나요? 생각지도 못했던 자리에서 들려온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본 적이 있나요? 어쩌면 그 절망의 순간이 새로운 소명이 주어지는 때일지도 모릅니다.
엘리야, 야훼는 나의 하느님!
엘리야라는 이름은 “야훼는 나의 하느님이시다.”라는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예언자입니다. 모세처럼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고(1열왕 19장),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간(2열왕 2,11) 특별한 예언자였기에,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전령으로 다시 올 인물로 여겨집니다(말라 3,23-24).
구약 성경뿐 아니라 신약 성경에서도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실 때, 모세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마태 17,3; 마르 9,4; 루카 9,30). 또한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와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할 것이라고 언급되었습니다(루카 1,17).
엘리야의 승리와 이제벨의 위협
그러나 이 위대한 예언자도 깊은 절망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기원전 9세기경, 북이스라엘 왕국의 아합과 이제벨 시절에 바알 숭배가 확산되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크게 위협받던 시기에 엘리야는 카르멜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맞서 싸웠습니다(1열왕 18,20-40). 이 대결에서 승리함으로써 엘리야는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냈고, 온 백성은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시라고 외쳤습니다(1열왕 18,39). 그러나 분노에 찬 이제벨이 그의 목숨을 노리자, 엘리야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도망쳤습니다.
엘리야는 두려움에 휩싸여 시종까지 브에르 세바에 남겨 두고, 혼자 하룻길을 더 걸어 광야로 나아갔습니다(1열왕 19,3-4). 그리고 그는 “싸리나무 아래로 들어가 앉아서, 주님께 죽기를 간청”하였습니다(1열왕 19,4).
엘리야, 죽음을 청하다.
욥은 자기 고통의 근원과 그것을 덜어 줄 수 있는 이는 하느님이심을 이해합니다. 그는 고통 속에서 “아, 내 소원이 이루어지고 하느님께서 내 소망을 채워 주신다면! 하느님께서 결심하시어 나를 으스러뜨리시고 당신 손을 내뻗으시어 나를 자르신다면!”(욥 6,8-9; 7,14-15 참조) 하고 기도합니다.
요나 4장에서, 괴로움에 빠진 요나는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요나 4,3)라며 절규합니다. 욥이 고통 속에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랐고, 요나가 삶보다 죽음을 원했던 것처럼, 엘리야 또한 자신이 더는 버틸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1열왕 19,4).
“엘리야는 싸리나무 아래에 누워 잠이 들었다.”(1열왕 19,5) 여기서 엘리야가 싸리나무 아래에 누운 것은 육체적 탈진뿐만 아니라 여러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인 심리적 고통을 의미합니다.
엘리야가 땅에 눕는 것을 묘사하는 동사인 “šākab(누워 있다)”는 종종 지하 세계에 있는 죽은 자의 상태를 나타낼 때 쓰입니다(시편 88,6 참조: “[죽은 이들이] 무덤에 누워 있다.”). 구약 성경에서의 죽음과 매장을 표현하는 공식 문구인, “조상들과 함께 누워 있다.”라는 표현에서도 같은 동사를 사용합니다(1열왕 1,21; 2,10; 11,21.43 참조).
이러한 죽음의 의미에 더해, 엘리야가 누워 있는 위치, 즉 “나무 아래”도 중요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나무는 종종 매장지로 사용되었고, 나무 근처에 매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창세 35,8: “참나무 아래”, 1사무 31,13: “에셀 나무 아래”). 엘리야가 죽기를 기도한 후 나무 아래에 누워 “잠을 자는” 것은 죽겠다는 그의 결심을 드러내는 신호입니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브에르 세바 근처 광야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누워 있는 엘리야를 천사가 흔들어 깨워 그에게 빵과 물을 먹고 마시게 합니다. 천사에게 두 번이나 음식과 물을 공급받은 엘리야는 힘을 얻어 밤낮으로 사십 일 동안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1열왕 19,5-8).
호렙산의 동굴에 도착한 엘리야는 그곳에서 밤을 지내는데, 그때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1열왕 19,9ㄴ.13)라는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카르멜산에서 우상 숭배자에게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 주었음에도, 빵과 물을 마시고 힘을 얻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어도 엘리야의 상태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 번이나 불평을 반복합니다.
“저는 주 만군의 하느님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신의 계약을 저버리고 당신의 제단들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1열왕 19,10.14)
엘리야는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송두리째 잃어버립니다.
“조용한 소리”,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
이때 하느님께서는 네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성경 본문은 산을 할퀴고 바위를 부수는 강한 바람, 지진, 그리고 불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엘리야 역시 이 일들을 목격한 것 같지 않습니다. 산속 동굴에 숨어 있다가 불이 지나간 후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그가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기 때문입니다(1열왕 19,12-13).
13절은 엘리야에게 들린 “소리”만을 언급하는데, 이는 성경 저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바람, 지진 그리고 불과 같은 극적인 현상이 아니라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속에 계십니다. 아주 조용하고 부드러운 이 소리는 다시 한번 엘리야에게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1열왕 19,13)라고 묻습니다. 엘리야는 다시 한번 완강하게 불평합니다(1열왕 19,14).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다른 일을 시키십니다.
구약 전통에서 하느님의 도움이나 개입은 대개 인간적인 지원, 즉 동맹, 공동 지도자, 그리고 후계자의 임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탈출 18,19-26; 민수 11,16-17 참조).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의 고통을 덜어 주시기 위해 그에게 새 임무를 주시고, 엘리사를 그의 후계자로 지목하십니다.
“길을 돌려 다마스쿠스 광야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거든 하자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임금으로 세우고, 님시의 손자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1열왕 19,15-16)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의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십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충실한 예언자는 자신만이 남았다고 생각했는데(1열왕 19,10.14), 하느님께서는 실제로는 칠천 명이 남았다고 알려 주십니다(1열왕 19,18).
엘리야는 “혼자만” 남은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는 하느님의 음성, 즉 부드러운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상태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따라 행동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공감하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예상치 못한 새로운 방법으로 절망하고 두려움에 빠진 엘리야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분께서는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 불 등으로 엘리야를 놀라게 하여 그를 억지로 동굴 밖으로 끌어내지 않으십니다. 강요 대신에 조용한 소리로 엘리야에게 다가가십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의 상태에 맞춰 자기 계시 방법을 조정하신 것입니다.
욥의 고통 앞에서 친구들이 일주일 동안 아무 말 없이 곁에 앉아 있었듯이(욥 2,13), 하느님께서는 절망한 예언자 곁에 부드럽고 작은 소리로 함께하셨습니다. 때로는 어떤 웅장한 말보다, 조용히 곁에 있어 주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엘리야의 절망 속으로 찾아오셨습니다. 힘으로 우리를 끌어내지 않으시고, 우리 상황에 맞추어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참고 자료
1) W. Beuken, “šākab”, Grande Lessico dell’Antico TestamentoIX, 258.
2) E. E. Kozlova, “1 Kings 19 and Its Emotional Repertoires. The Horeb Theophany Revisited”, in Vetus Testamentum(2025), 10-11.
3) 위의 글, 1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