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성경에서 만난 나의 하느님> 시리즈의 “네 이름이 무엇이냐?”(창세 32,28)에서 이어집니다.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은 이름과 존재의 의미, 그리고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가치를 아름답게 노래하는 시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존재를 특별하게 만듭니다. 이름이 불리기 전까지는 무의미해 보이던 존재가, 비로소 의미 있는 꽃으로 피어나게 됩니다.
성경에도 하느님께서 이름을 불러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이름을 알려 달라는 야곱의 부탁에 아무 답이 없으셨던 하느님께서는 살인을 저지르고 파라오를 피해 미디안 땅으로 가 있던 모세를 부르시고, 당신의 특별하고도 이상한 이름을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이름을 밝히시는 사건은 단순한 신비를 넘어 인간에게 주어진 소명과도 닿아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신 분
지난 글에서 말했듯, 야곱은 야뽁강에서 낯선 남자와 씨름을 한 후 그의 이름을 물었지만 거절을 당합니다.
“내 이름은 무엇 때문에 물어보느냐?”(창세 32,30)
마찬가지로 판관기 13장에서도 “주님의 천사”,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천사”, “하느님”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삼손의 부모인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나타나자 마노아가 물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래야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면, 저희가 당신을 공경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판관 13,17)
그러자 주님의 천사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내 이름은 무엇 때문에 물어보느냐? 그것은 신비한 것이다.”(판관 13,18)
즉, 그분의 이름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양을 치며 도망자로 살고 있던 모세에게 하느님께서는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나타나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이집트에서 억압받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음을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형제들을 위해 나섰다가 불행한 일을 겪고 이집트에서 도망친 모세에게 나타나십니다. 광야에서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돌보던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탈출 3,4).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6)라며 조상의 신을 소환하는 그 음성은 모세의 진짜 정체성을 상기시킵니다. 그는 입양으로 이집트인이 되었고 선택으로 미디안 사람이 되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히브리인입니다.
불타는 떨기는 단순히 모세를 부르는 상징적 장치만은 아닙니다. 불타는 떨기의 핵심 의미는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상호 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창세기 6장-9장에서의 대홍수 이후, 창세기 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을 내리신 사건을 제외하면 하느님께서 자연에 직접 개입하신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세와 그의 동시대 사람들은 물이 피로 변하고, 빛이 어둠으로 변하고, 바다가 갈라지고, 바위에서 급류가 흐르고, 산이 불타오르는 등 어마어마한 기적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불에 타는데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는 앞으로 일어날 기적들에 대한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전달할 모세는 점차 이 기적들의 경이로움에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모세 앞에서는 불에 타며 없어지지 않는 덤불이 나타나지만, 앞으로 목격자들이 많아질수록 이러한 자연 현상에서 일어나는 기적의 규모는 어마어마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상조차 하지 못하는 모세는 불타는 떨기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 하느님, 즉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탈출 3,6)과 노예가 된 백성들을 해방시키겠다는 하느님의 약속(탈출 3,7-10)에 의문을 품게 됩니다.
탈출기 3장에서 하느님께서 이름을 계시하시는 것은 긴장감으로 가득 찬 상황에서 일어납니다. 히브리인들을 없애고자 하는 파라오와 고통받는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하느님 사이의 승부가 예상되는 가운데, 모세는 방금 자신에게 주어진 상상할 수 없는 부름,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라.”라고 하시는 하느님의 명령에 어떻게 응답할까요?
수수께끼 같은 하느님의 이름, “나는 있는 나다.”
모세는 하느님께 정체를 밝히라고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세에게 많은 것을 약속했고(탈출 3,6-7 참조), 모세의 어깨에 그토록 무거운 짐을 얹었기 때문입니다(탈출 3,10 참조). 모세는 이제 이집트로 돌아가 자신에게 계시된 모든 것들을 믿고 신뢰하도록 히브리인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히브리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으로 자랐고, 그들의 고통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모세가 도망친 후 지난 몇 년 동안 그들과 멀리 떨어져 방랑하는 양치기 목동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자신의 백성들에게 모세는 완전히 낯선 사람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또한 오래된 고대 근동의 전통과 삶의 환경에서 특정한 신을 아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이름을 아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신의 이름을 모른다면 그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여쭙습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탈출 3,13)
모세의 질문에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을 세 가지로 대답하십니다.
첫 번째는 “나는 있는 나다(Ehyeh asher ehyeh).”(탈출 3,14ㄱ), 두 번째는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3,14ㄴ)에서 “있는 나(Ehyeh)”, 세 번째는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3,15)입니다.
이 수수께끼 같은 이름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Ehyeh asher ehyeh)’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나는 있는 나다.”처럼 동사가 현재형으로 번역되었지만, “나는 내가 될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할 수 있는 하느님께서는 다사다난한 히브리인들의 앞날에 대한 주권을 가지십니다. 이 이름은 현재뿐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조상들의 하느님, 야훼
한편, 모세의 질문에 3,15에서는 “야훼”라는 이름을 언급하시면서 6절과 13절의 “아버지(조상들)의 하느님”이라는 표현과 같은 분이심을 밝힙니다. 15절의 이 말씀을 통해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은 곧 “야훼”이심이 드러납니다. 그는 예전부터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는 이전 세대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이시며 아직 오지 않은 세대가 경배할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탈출 3,15)
“나의 칭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zikrî’는 몇몇 맥락에서 “나의 기념”, 즉 “내가 기억되는 방식”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의 칭호”라는 번역에는 결국 “기억”의 의미가 암시되어 있으며, 그분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이름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이름 야훼는 조상들의 하느님으로서 과거에 뿌리를 두고 계시며, 미래에도 열려 있는 영원한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렇게 애매모호하고 신비스러운 이름으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셨지만, 하느님께서 모세 앞에 나타나신 이유는 아주 명확합니다. 그분은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의 고통을 단지 알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고통을 보고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탈출 2,23-25; 3,7-9). 그래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오셨습니다(탈출 3,8).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땅의 약속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탈출 3,8), 모세에게는 백성들을 이끌고 탈출하라는 소명을 주십니다(탈출 3,10).
모세가 이집트 땅에서 처음에 자신의 백성을 구하려 한 노력은 효과가 없었고, 그는 오히려 살인자가 되었으며 그 결과 히브리 백성들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소명에 따라 이집트로 돌아가서 그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가져와야 합니다.
모세가 어깨에 지워진 소명의 무게 때문에 회피하고 불안을 느낄 때 하느님께서는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시며 모세를 안심시키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모세에게는 성공에 대한 보장이 되고, 이집트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와 함께 행하실 강한 능력을 의미합니다. 야훼로 드러날 하느님(탈출 3,15)께서는 모세와 모든 백성을 위해 역동적이고 강력하게 행동하시는 “함께 있는” 하느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