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대 신학과에 재학한 지 어느덧 만 1년이 되었다. 입학 초부터 지금까지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있다. “나중에 어디에 취업할 거야?” 이 질문은 신학과 면접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직업을 선택하기보다 어떤 진로를 향해 나아갈지에 대해 고민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도구’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신학과에 진학했지만, 때때로 내 자리와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신학을 공부하는 평신도 학생으로서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이 배움은 어디를 향하는지 스스로 묻기도 한다. 그 안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찾아가고 있다.
그러던 중, 가톨릭대 신학대학 학보 239호에서 ‘순교자 성월’을 주제로 기사를 준비하며,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가 생겼다. 나는 평신도로서 신학을 배우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지만, 성인은 이미 그 길을 걸으며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데 헌신했다. 그의 삶을 따라 읽으며 내가 걷는 이 길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생애
조선 후기는 어둠이 깔린 시대였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곧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다. 이러한 가톨릭 박해 시대에 교회를 위해 헌신한 지도자가 바로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다. 그는 조선의 유서 깊은 양반의 후예로, 최초로 신앙을 받아들인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1839년에 순교한 어머니 유소사 체칠리아의 아들이었다. 즉, 순교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을 깊이 배웠던 그는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는 일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았다.
그는 목자가 없는 조선 교회를 위해 북경을 오가며 선교사들을 초청하는 데 힘썼다. 당시 사제를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번번이 기회가 무산되었다. 결국 그가 직접 나섰다.
특히 그는 가톨릭 신앙과 조선 사회의 갈등을 해소하고 신자들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집필했다. 이 글은 조정 대신들에게 보내는 상소문 형식으로, 천주교 신앙이 결코 반역이 아니며 오히려 윤리적으로 올바른 길임을 주장하는 신학적 문서였다. 그는 유교적 전통 속에서도 가톨릭 신앙이 조선 사회에서 자리 잡도록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또, 신학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신자들에게 올바른 교리를 전파하는 일에도 헌신했다. 선교사들과 교류하며 신학적 지식을 쌓았고, 신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비록 신품 받기 직전에 박해가 일어나 사제가 되지는 못했지만, 평신도로서 신학적 사고를 실천하며, 조선 교회의 기틀을 다지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그는 체포되었고, 신앙을 버리라는 강요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믿음을 지켰으며,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보여 주었다. 결국 그는 칼날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강건한 모습으로 믿음을 증거하며 순교했다.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찾아서
한국 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라고 불린다. 외국 선교사에 의해 전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인 평신도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한국 교회 안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청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한다.
사실 하고 싶은 건 많다. 학교 입학 초창기에는 교회법에 관심을 가졌고, 한옥 건축과 연관 지어 교회 건축에도 흥미가 있다. 그러다 어릴 적부터 가진 역사에 대한 애정이 다시 상기되면서, 건축과 이콘·성화에 관해 관심이 커졌고, 나아가 교회사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러던 중 감사하게도, 나의 길을 넓혀 가고 힘을 보탤 수 있는 자리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학교 내에서는 신학 동아리(가톨릭 신학 연구회)와 철학 동아리(철학 동우회)에서 활동하고, 학보사에서는 서툰 글솜씨로 기사를 쓴다. 또 학생회와 교목실에서도 부장직을 맡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학교 바깥에서도 의미 있는 활동들이 이어진다.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위한 지역 조직위원회(L.O.C)의 기획사목국 기획팀에서 활동하고, 군종교구에서는 청년이자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2024년 11월에는 군종교구 청년 대표로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 상징물 전달식’을 위해 로마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활동 속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내게 가장 큰 자극이 된 순간은 지난 11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알현한 때였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미사와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 상징물 전달식’을 앞두고 맞이한 그 짧은 순간은 여전히 생생하다. 함께 온 청년들이 교황님과 차례로 악수하고,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사실 교황님을 알현하게 되면 어떤 말씀을 드릴지 고민하며 긴 문장을 준비했지만, 막상 입에서 나온 말은 “Sto imparando teologia(저는 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였다.
곧 교황님께서는 미소 지으며 엄지를 들어 보이셨고, 그 순간 내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단단해졌다.
그날 이후, 스스로 되묻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길을 가야 하며, 어떻게 하느님의 도구로 쓰일 수 있을까.’ 신학과에 있다 보면 종종 듣는 말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 말이 내 안에서 잔잔하게 맴돈다.
어떤 일을 하든, 어떤 길을 택하든 신학은 나의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신학 위에 놓일 모든 것은 신앙이라는 단단한 틀 안에서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5단 묵주를 쥐고 한 알에 원망을, 한 알에 지향을 외칩니다.
성모님, 제가 장미 한 다발을 엮어 바치도록 함께하여 주소서.
아, 아버지
당신께 가는 길에는 고난이 너무 많습니다. 이 묵주알 만큼 많아서 때로는 기도문을 읊다 멈칫거리듯 넘어집니다. 시작에 당신이 계셨으니, 끝에도 당신이 계시리라는 믿음만으로 제 십자가를 다시 집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갇혀 있지 않고, 당신과 다시 가까워지도록 애써 보기로 합니다. 걸음마다 당신의 수난 공로를 기억하게 하소서. 당신을 닮아가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 참고 자료
《가톨릭 성인전》, 가톨릭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