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특집 ④ 한국어, 관계를 말하다

가톨릭 예술

월간 특집 ④ 한국어, 관계를 말하다

‘대봐야’ 아는 한국어 번역 이야기

2025. 1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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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라는 말이 있다.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본래 뜻에서 살짝 벗어나 보자. 하나만 있는 상황에서는 긴지 짧은지 알 수 없다. ‘대볼무언가가 필요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뭘 잘하고 못하는지 또한 혼자서는 알 수 없다. 다른 사람과 대봐야파악이 가능한 것이다. 언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어려서 배운 모국어를 평생 잘 써 왔다 해도, 그 모국어가 어떤 언어인지는 잘 모를 수 있다. 다른 언어와 대봐야이런 이해가 가능하다.

 

외국어를 배우다 보면 한국어가 보인다. 한국어에 없는 문법이 쏟아진다. 고교 시절에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배울 때 명사마다 성별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책은 남자고 테이블은 여자라니?’ 한국어에서는 명사의 성별을 외울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생각했다. 대학 때 러시아어를 배우면서는 6격을 힘들여 익혀야 했다. 주어냐, 목적어냐 등 문법 지위에 따라 명사와 형용사의 형태가 일사불란하게 바뀌었다. 한국어는 명사 형태를 고정한 채 조사를 붙여 문법 지위를 표시하는 언어라는 점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통번역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번역 일을 하면서부터는 더더욱 한국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흔히들 통번역대학원은 외국어를 갈고닦는 곳으로만 생각하지만, 외국어 능력 못지않게 한국어 능력이 끊임없이 시험대에 오르는 곳이다. 모국어인 한국어는 당연히 잘해 내겠거니 하는 생각은 첫 수업 시간부터 박살이 나고 만다. 명확한 발음, 풍부하고 정확한 어휘, 표현과 문장에 이르기까지 온 사방에서 드러나는 내 모국어의 한계를 부지런히 보강해야 한다는 평생의 과업을 깨닫는다.

 


 

종결 어미로 완성되는 번역의 세계

 

나는 주로 영어와 러시아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고, 그러다 보니 외국어 원문을 어떻게 한국어로 옮기면 좋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깨달은 것은 한국어의 공손법 종결 어미가 갖는 힘이었다. 공손법 종결 어미라 하니 용어가 좀 어렵다. 사실은 한국어 화자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선택해 쓰는 표현법이다. 상대방에게 내일 오라고 말할 때 내일 오게.”(하게체)라고 할지, “내일 와.”(해체)라고 할지, “내일 와요.” 혹은 내일 오세요.”(해요체)라고 할지, “내일 오십시오.”(합쇼체)라고 할지 선택하는 것 말이다.

 

무의식중에 이루어지는 이 선택의 기준은 무엇일까? 일단 화자와 청자의 나이 차이가 작용한다. “내일 오게.”내일 와는 화자가 청자보다 나이가 많거나 최소한 같아야 쓸 수 있는 종결 어미다. 다음으로는 친밀함의 정도도 작용한다. 같은 나이라 해도 내일 와.”는 아주 친한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덜 친하다면 내일 와요.”내일 오세요.”를 선택하게 된다. 대화 상황의 공식성도 기준이 된다. 공식적인 자리일수록 내일 오십시오.”와 같은 더 공손한 표현이 사용된다.

 

내가 번역 원문으로 만나는 영어와 러시아어에는 당연히도 공손법 종결 어미 같은 표현법이 없다. 하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글 속 대화에서는 공손법 종결 어미가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번역가가 개입하게 된다.

 

최근에 번역한 체호프의 단편 소설에는 두 남성 인물이 나누는 대화가 등장한다. 이 대화의 공손법 종결 어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꽤 길었다. 두 남성이 어느 정도 가까운 사이인지,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최종 선택한 대화 번역은 다음과 같았다.

 

왜 그렇게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건가?”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벨로쿠로프에게 물었다. “내 삶은 지루하고 힘들고 단조롭지. 그건 내가 예술가이고 이상한 사람이기 때문일세. 하지만 자네는 다르지 않나.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람, 지주에 귀족이니까. 왜 그렇게 재미없게 사는 거지? 예를 들어, 어째서 아직도 리다나 제냐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 건가?”

내가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걸 잊은 모양일세.” 벨로쿠로프가 대답했다.

 

이 대화문은 두 사람의 나이가 엇비슷하다는 것, 하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는 판단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두 인물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소설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웃집 처녀들을 결혼 상대로 생각할 수 있는 연령대였으므로 20대 후반에서 30대 정도로 비슷할 것이라 추측했다. 두 인물의 친밀함 수준 역시 소설 곳곳에 흩어진 단서들을 통해 추정해야 했다. ‘는 지주 벨로쿠로프의 집에 세 들어 있다. 밤마다 맥주를 마시면서 속을 터놓는 사이지만 는 벨로쿠로프의 여러 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기 과시를 위해 대화를 논쟁으로 끌고 가는 성향은 특히 질색이다. 이를 종합해 깍듯한 합쇼체도, 친밀한 해체도 아닌 중간으로 가기로 했다. ‘ㄹ세라는 하게체를 선택한 데에는 19세기의 분위기를 풍기고 싶다는 점, 성인 남성들의 진지한 대화가 지닌 무게감이 전달되어야 한다는 점 등 추가적인 고려 사항도 작용했다.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공손법 종결 어미가 번역가를 괴롭히는 존재로 여겨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는 번역문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귀중한 도구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공손법 종결 어미를 통해 나는 작품 속 인물을 그려 나간다. 상대를 어렵게만 여기는 수줍은 아가씨는 합쇼체의 극존칭을 사용하게 한다.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안하무인의 거친 사내라면 상대를 불문하고 해체를 남발하게 한다. 독자들은 한국어 대화문만 읽어도 어떤 사람이 말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관계의 언어, 한국어

 

공손법 종결 어미는 인물 관계의 역동적 변화도 드러내 준다. “저녁이 되니 날씨가 좋아졌습니다. 어디 좀 멀리 나가 볼까요?”라고 말하던 남자는 상대와 연인 사이가 된 후 방금 호텔 로비에서 당신 성을 알았어. 폰 디데리츠라고 써 있더군.”이라고 말투를 바꾼다. 합쇼체로 예의를 차리면서 시작된 대화는 논쟁이 벌어져 감정적으로 충돌하게 되면서 어느새 해요체로, 이어 해체로까지 종결 어미가 변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에서 시작해 내 생각은 이렇다고!”로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공손법 종결 어미,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에게 커다란 어려움을 안기는 한국어의 이 특징은 무엇을 뜻할까? 나는 여기에 관계 중심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다. 한국어는 대화문 하나하나에 화자가 청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드러내는 언어인 것이다. 더 나아가 화자와 청자 간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고서는 대화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언어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어의 관계 중심성을 나는 인물 지칭에서도 발견한다. 원문에서는 언니/누나인지 여동생인지, /오빠인지 남동생인지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한국어에서는 화자와의 관계가 밝혀져야만 단어를 골라 쓸 수 있다. 그 관계를 보여 주는 단서를 찾아 번역가는 눈에 불을 켜고 원문 곳곳을 살핀다. 어딘가에 명확한 단서가 나와 있다면 해결되는데 그렇지 못한 때도 많아 애를 태우기 십상이다. 원문에서는 여동생이 언니를 리디아라고 지칭하고 있지만 한국어에서는 리디아 언니혹은 언니라고 해야 하고, 언니의 남편은 블라디미르가 아니라 형부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어에서는 이름 지칭이 극히 드물다. 대신 누구 엄마, 올케, 이모, 작은어머니 등 관계어가 사용된다. 선생님, 주임님, 사장님 등의 직함도 이름을 대신한다. 내게는 친정의 친가에 작은어머니(숙모)가 무려 네 분이다. 불과 십여 년 전까지도 그분들 이름을 알지 못했다. 알 필요가 없었다. “막내 작은어머니가 이거 갖다 드리래요.”라고 말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작은어머니들과 내가 일대일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카톡이 연결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이름을 알게 되었다.

 

내가 번역하면서 다루는 영어와 러시아어에서는 지칭이 대부분 이름이다. 화자보다 나이가 많아도 지위가 높아도 이름을 부른다. 나름의 보완 장치가 있기는 하다. 러시아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도대체 등장인물 이름이 복잡해서 이해하기 힘들다고 이구동성으로 하소연하는 이유가 바로 이름 지칭의 보완 장치 때문이다. 러시아 인명은 이름+부칭(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는 부분이다)+성으로 이루어지는데 지칭할 때 전체가 다 사용되기도, 이름+부칭 형태가 사용되기도, 이름을 변형해 만든 애칭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공식성 정도나 친밀감이 표현되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면, 이러한 지칭 장치를 번역할 때는 한국어 화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조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러시아어 원문에서의 지칭을 고스란히 옮겨 놓으면 어차피 효과도 전달되지 않고 이 인물이 대체 누구인지 파악하기 어렵게만 만들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하소연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한국어에서는 왜 이름 지칭을 꺼릴까? 사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 조심스러움도 있겠지만 이름만으로는 관계를 드러내기 어렵다는 점도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이름은 인물과 일대일로 명확히 대응되지만 그 대응을 미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한다. 반면 막내 작은어머니라는 관계 지칭은 내가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누구에게든, 심지어 가족을 벗어난 제삼자에게라도 바로 전달 가능하지 않은가.

 

한국어의 관계 중심성은 결국 우리 문화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나는 번역을 하면서 끊임없이 한국어를 외국어와 대보는작업을 하고 한국어의 특징을 발견한다. 그리고 나를 키운 문화가 어떤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이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에 대한 생각으로도 이어진다. 대보고 알아가는 과정은 굳이 번역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평생 하게 되는 일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더 알아갈수록 나를, 내 언어를, 내 문화를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Profile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지금은 책을 번역하고, 글쓰기 수업에서 학생들의 글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클래식 기타 치는 일이 취미로 혼자 연주하기도 하고, 합주단에 소속되어 중주나 합주를 하기도 합니다. 더 잘 치고 싶어 매일 조금씩 연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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