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영혼들을 지켜 주시는 요한 보스코 성인

영성과 신심

어린 영혼들을 지켜 주시는 요한 보스코 성인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모든 신부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글을 바칩니다.”

2025.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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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역경을 마주할까. 신학과 2학년생인 지금, 나는 그야말로 철학적 암흑기를 지나고 있다. 철학자들의 이름과 사상이 쏟아지는 강의실은 마치 전장(戰場) 한복판 같다. 철학자들은 저마다 난해한 개념을 제시하고, 나에게 끝없는 사유를 요구한다. 동시에 교내외에서 여러 역할을 맡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느라 하루하루가 쉴 새 없이 흘러간다. 주변에서는 나더러 완벽주의자라고 하지만, 정작 나는 책임감에 짓눌려 지쳐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학생의 본분인 공부는 소홀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던 2025422, 1학기 중간고사 기간의 점심 무렵이었다. 교목실의 월례 미사를 마친 뒤, 제대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면서 답답하고 어지러웠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손과 발은 경직되어 있었고, 걱정스러운 얼굴의 교수 신부님께서 곁을 지키고 계셨다.

 

그날 이후 사흘 동안 나는 일곱 번이나 쓰러졌다. 그 사흘간의 기억은 마치 시간이 끊긴 것처럼 낯설고 흐릿하기만 하다.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교수 신부님들께서 늘 곁에 계셨다는 사실이다. 나는 5월의 짧은 연휴 기간에 병원에 입원했다. 진단명은 과로였다.

 

그전에도, 지금도 나는 신부님들의 기도와 따뜻한 눈빛 속에서 힘을 얻고 있다.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며 혼란스러웠던 시간을 되돌아보니 요한 보스코 성인이 떠올랐다. 존경하는 한 신부님의 본명이기도 하다. 조금은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성화 속 성인의 온유한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신부님의 따뜻한 시선이 떠올랐다.

 


 

아이들을 사랑한 요한 보스코 성인의 생애

 

돈 보스코라고도 불리는 요한 보스코 성인은 1815816, 이탈리아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복고라 불리는 정치·사회적 전환기의 초입으로, 불안과 변화가 혼재된 시대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는 어머니 마르게리타의 깊은 신앙 안에서 자랐으며, 가난 속에서도 하느님께 둔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12살이 되던 1827년부터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포도밭과 들에서 일하고 가축을 돌보며 하루를 보냈다. 그의 삶은 당시 가난한 아이들이 흔히 겪는 고된 현실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었다.

 

9살 무렵의 그는 평생 잊히지 않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는 아이들의 싸움을 말리려다 오히려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그때 고상한 옷차림을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분은 온유와 사랑으로 아이들을 이끌라고 말씀하시며, 순명과 지식으로 이 사명을 이루라고 하셨다. 이 꿈은 그의 사제 성소의 씨앗이 된다.

 

어머니 마르게리타는 그의 신앙 형성과 인격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성인이 처음으로 드린 신앙 행위 중 하나는 묵주 기도였다. 그 기도를 통해 그는 성모님과 대화하기 시작했고, 그분이 자신을 바라보며 귀 기울여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1841, 그는 사제 서품 피정 중에 신부는 혼자 천국에 가지 않는다.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또한 사제직이 자신을 넘어 다른 이들까지 구원으로 이끄는 소명임을 자각하게 됐다. 이후 그의 삶은 철저히 영혼을 구하는 일에 바쳐졌다. 그 무렵 수많은 청소년은 산업화로 인해 장시간 노동 현장에 동원된 부모에게서 방치되어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성인은 그들의 삶 속으로 다가가 단지 빵이나 일자리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고 하느님과 만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그는 놀이·기도·교육·사랑이 어우러진 오라토리오(Oratorio)’를 열어, 청소년들에게 쉼과 희망의 공간을 제공했다.

 

아이들은 그에게 진심 어린 애정을 느꼈다. 그는 힘든 아이들을 찾아가 위로했고, 나쁜 주인을 만난 아이들을 정직한 사람들과 이어 주었다. 언제나 아이들의 편이었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아이들을 위해 살았다. 그 안에서 아이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배웠다. 그는 빵이 부족해도 신앙은 사람을 살찌운다.”라고 말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평온히 이야기하고 그들을 성사로 이끌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은 이후 살레시오회를 창립하여 전 세계 청소년을 위한 교육 사도직을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1888131,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1934년 비오 11세에 교황에 의해 시성된 그는 오늘날에도 청소년·교육자·사제들의 수호성인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내게 다가오시는 하느님

 

어느새 나는 신부님들 사이에서 금쪽이가 됐다. 가톨릭대 신학대학에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학생들과 교수 신부님들이 운동장을 함께 산책하는 문화가 있다. 동기들과 산책하고 있으면, 가끔 교수 신부님들께서 다가와 다정하면서도 은근히 잔소리처럼 느껴지는 질문들을 건네신다.

 

오늘 몸은 어때?”

아침은 먹었어?”

점심은 먹을 거지?”

 

어느 날은 한 신부님께서 내가 너무 잔소리만 하는 것 같지?”라고 하시기에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신부님, 이런 잔소리는 환영입니다.”

 

특히 학교 안에서 내가 참여하는 활동을 담당하시는 교수 신부님들은 면담이 필요하면 언제든 주저 없이 요청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언제나 기도하고 있다고 덧붙이신다. 간혹 면담할 때면, 마음을 다해 들어 주시고는, 누구보다도 당신의 일인 듯 진심 어린 위로와 조언을 건네신다.

 

요한 보스코 성인이 묵상하며 얻은 신부는 혼자 천국에 가지 않는다.”라는 깨달음이 바로 내 삶에서 드러나는 듯하다. 아마도, “과연 제 곁에 하느님께서 계실까요?”라는 물음, 해결되지 않고 늘 마음속을 맴돌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다가온 것이 아닐까.

 

신부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저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신부님의 시선에서 하느님께서 제 곁에 계심을 느낍니다. 신부님을 닮기에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나, 언젠가 받은 사랑으로 신부님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기를 바라며, 부단히 살아가겠습니다.’

 


 

참고 자료

《청소년의 친구, 스승, 아버지 돈보스코》, 돈보스코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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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도보 여행을 하다 보면 때로는 예상치 못한 만남을 경험합니다. 길가에 피어난 작은 생명, 끝없이 출렁이는 바다, 광활한 하늘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고, 저를 주님께로 이끌어 줍니다. 혼자 떠나는 길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바라보는 경이로운 순례입니다. 길 위에서 마주하는 삶의 조각들 속에서 발견하는 은총이 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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