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재직할 때, 한 직원이 어떤 신부님의 작품을 보러 왜관으로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왜관이라니! 버스로 몇 시간을 타고 가야 하는데…….’ 속으로 생각하며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분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설득에 결국 마음을 바꿨다. 당일 버스에는 미술, 건축 전공자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렇게 중요한 분이었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설렜다.
그날 우리는 김정신 교수님의 지도로 ‘알빈 슈미트(ALWIN SCHMID)’ 신부님의 작품들을 직접 보고 배우고자 왜관 베네딕도회로 향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이분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했고, 크게 관심도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며 폐허가 된 우리나라에 수도자이자 신부님으로서 성당 건축과 미술에 혁혁한 공을 세우셨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날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하고 값진 것이었는지는 말로 다할 수 없다. 지금까지도 그날의 감동과 여운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봤던 그분 작품 때문만은 아니다.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알빈 슈미트 신부님의 생애와 그분의 작품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사상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 상황
역사적으로 조선의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님은 독일의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고등 교육을 통한 전교를 위해 한국 진출을 요청했다. 박해가 끝난 1909년, 성 베네딕도 수도회는 한국에 진출하여 근대 실업 교육을 통해 한국인 스스로 성미술의 기반을 마련하게 했으며, 지난 100년간 한국 천주교회 성미술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1920년대 이전까지의 성미술은 주로 중국에서 들여온 성물과 상본, 그리고 서양인 선교사들이 세운 성당과 서양에서 들여온 성미술품이 대부분이었다.
비록 이 시기에 한국인이 직접 성당을 설계하고 예술품으로서의 성미술을 만들지 못했지만, 한국 천주교회 성미술의 기반이 형성된 중요한 시기였다는 점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알빈 신부님은 1978년 왜관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 17년간 전국적으로 122개의 성당을 비롯한 185개의 가톨릭 건물을 설계하여 한국 그리스도교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알빈 슈미트 신부님의 생애
알빈 슈미트(1904~1978) 신부님은 1904년 독일 남부 지방의 슈파이힝엔(Spaichingen)에서 태어났다. 1927년 뮌헨 대학에 입학하여 미술사를 전공한 후 베를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과 빈 대학에서 조형미술을 공부했다.
1931년 5월, 성 오틸리엔 베네딕도 연합회(Congregatio Ottiliensis Ordinis Sancti Benediciti) 소속의 독일 뮌스터슈바르차흐(Muensterschwarzach)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1936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듬해인 1937년에는 한국 선교사로 파견되어 간도의 연길 성시 성당의 내부 수리를 맡아 그가 직접 그린 그림들로 제대 주변을 장식했는데, 이 조선식 그림은 신자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알빈 슈미트 신부님의 미술과 건축
1943년 그 성당 주임으로 사목하다가 광복 이듬해에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남평 수용소와 하얼빈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949년 독일로 추방되었다.
1961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의 12년은 그가 건축가로 변신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당시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된 교회 건축의 재건이 활발했으며, 전례 운동과 근대 건축 운동을 선도하고 있었다. 전례 운동은 알빈 신부님에게 보이론파 미술과 함께 많은 영향을 미쳤다.
- 전례 운동
전례 운동은 그리스도교 미사와 전례에 신자들의 적극적이고 진지한 참여를 회복시키려는 운동으로 19세기 전 유럽에서 일어난 대규모 종교 주제 회화 부흥과도 이어진다. 이는 신자들이 전례에 더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는 움직임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알빈 신부님도 간도 사목 시절, 사제가 벽을 보고 미사를 드리는 기존의 방식 대신, 교회가 아직 공인하지 않은 ‘신자들을 향한 미사(대면식)’를 드리기도 했다.
이러한 전례 운동은 알빈 신부님의 건축관에도 영향을 주었다. 알빈 신부님은 건축물을 설계할 때, 내부를 당시 주를 이루던 고딕 양식 교회 건축물의 길쭉한 형태에서 벗어나 부채꼴 모양이나 타원형으로 만들어 제단과 신자들의 거리를 가깝게 함으로써 미사 예식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수사였던 알빈 신부님의 교회 건축과 벽화 제작은 장발 화백 이후 공백기였던 한국 그리스도교 미술의 기반을 형성하며 현대화에 기여했다. 이전에는 성모자상, 성 김대건 신부, 한국 순교자 등 인물 중심의 주제 선택이 주를 이루었지만, 알빈 신부님의 그림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담아냄으로써 단순한 벽면 장식을 넘어 교리 교육적 역할까지 하였다.
- 보이론파 미술 양식
알빈 신부님의 벽화에 나타나는 기하학적이며 평면적인 특징은 보이론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보이론파 미술은 19세기 독일의 그리스도교 미술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던 미술 양식으로 독일 교회 미술의 기틀을 마련했다. 다시 말해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에 의해 시작된 보이론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서 가장 순수한 형태와 양식을 추구했다.
따라서 보이론 미술은 사실적인 표현을 배제하고 평면적이고 단순한 표현을 통해서 새로운 예술 형식을 시도한다. 선과 색, 몸짓과 용모는 오로지 신성한 분위기를 위해 사용되었고, 평면화된 구성을 위하여 곡선은 최대한 제거되었으며 공간성과 입체감은 기하학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알빈 신부님이 그린 벽화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생애 중 특히 그리스도의 공생활(公生活)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세부적으로 그리스도의 공생활, 성모 마리아, 열두 제자로 나눌 수 있다. 유럽 수도원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도회 창설자,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 한국의 성당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순교 성인, 성모자상은 그의 벽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를 통해 그의 작품은 성미술이란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두지 않는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부합하고,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복음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삼청 공소와 알빈 신부님
왜관 수도원에서 2km 떨어진 삼청리는 본래 1950년대 조성된 나환자촌이었다. 사람들의 박해를 피해 외곽 지역인 이곳에 자리 잡은 알빈 신부님은 수사님들의 도움으로 삼청리 공소(1953)를 비롯해 닭 농장, 병원, 주택, 공원 등을 세워 나환자들의 자립을 도우셨다.
공소 안에는 제단 벽면 중앙에 <생명의 나무>를 중심으로 양쪽에 <환자들을 고치시는 예수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알빈 신부님은 윤곽선을 굵게 하고 평탄한 색채를 사용하여 단순하고 평면적이며, 기하학적인 모습에 근접한 형태를 이끌어 냈다. 단순한 색과 면으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인체의 비례에 맞춘 기하학적 형태의 도형을 그림의 구성 요소로도 사용했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느 정도의 움직임을 가진다.

왼쪽 벽화는 그리스도께서 많은 환자 가운데 나병 환자가 자신의 병을 감추고자 했던 천을 벗기며 마치 “너의 병은 이제 다 나았다! 나의 손을 잡아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며 손을 내미시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오른쪽 벽화에서도 그리스도는 병상에 누웠던 병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자, 이제 너의 병이 나았으니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시며 다른 한 손으로는 생명의 나무를 가리키신다.

이처럼 작가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비례의 법칙을 통해 불변하고 질서정연한 영원성을 나타내고 있다. 중앙에 있는 생명의 나무와 함께 제단 양쪽 모두 파란 선과 회색 면을 통해 기하학적으로 표현한 이 벽화는 장식적인 효과와 동시에 시대성을 초월한 영구성을 지닌다. 물체의 형태를 규정하고 명시하기 위하여 굵은 윤곽선을 썼으며, 물체의 본질을 더 정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음영을 없앴다. 따라서 황색 색조의 농담으로 물체의 경계를 표시하고 제단 벽의 하얀 평면을 배경으로 하였다.
재미있는 점은 양쪽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병자들이 바로 한국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오른쪽 벽면에 서 있는 병자 중에 갓을 쓰고 있는 노인과 두루마기를 머리에 쓴 여인들을 볼 수 있다. 특히 그림 양쪽에 아기를 등 뒤에 업고 있는 여인들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당대 한국 소년 소녀들의 머리 스타일도 엿볼 수 있다. 단순하고 일정한 모습들 속에서도 두 팔을 가슴에 모으거나 두 손을 모은 모습을 통해 그들의 신앙심을 엿볼 수 있다.
알빈 신부님 그림과 나의 눈물
이제 그날 내가 왜관 삼청 공소에서 보았던 알빈 신부님의 작품을 통해 깨달은 신앙 체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서두에서 밝힌 대로 나는 김정신 교수님과 많은 전문가(건축, 미술 등)들과 알빈 신부님의 대표 작품이 모여 있는 시작점인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다양한 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버스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비좁은 길에 막혀 걸어가게 되었다. 그곳은 굉장히 작은 마을로, 지금은 몇 세대 정도만이 남아 있다고 들었다.
그 마을을 걷던 중 저 앞에 작은 언덕이 있고 그 위 소박하고 단출한 공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화려하거나 멋들어지지는 않았지만, 막상 공소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나도 모르게 “아!” 하고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작지만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을 빛나게 하는 것은 바로 알빈 신부님의 그림이었다.
모든 사람이 ‘와~!’ 하며 사진 찍고 그림을 감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때 교수님께서 우리들을 진정시키고 이 공소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나는 잊고 있던 사실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 공소가 위치한 곳이 나환자촌이었다는 사실에……. 현재는 거의 다 떠나가고 몇 안 되는 집들과 공소만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공소 안의 제단 벽화는 알빈 신부님의 작품이며, 이곳에는 독일 선교사 호노라도 신부님, 임인덕 신부님의 체취와 오스트리아 간호사 엠마 라이징거와 마가렛의 사랑과 봉사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나는 공소 맨 뒷자리에 앉아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렸다. 1950년대 나환우분들이 이곳, 바로 내가 앉은 이 자리에서 얼마나 고통의 눈물을 흘리셨을지……. 병의 고통보다 차별과 갈등이 그분들에게는 더 큰 아픔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분들은 내가 앉았던 공소의 이 자리에 앉아 알빈 신부님의 벽화를 보며 병을 고쳐 주시고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찾고 위로를 받으셨을 것이다. 나병 환자의 치유와 환자들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희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견디기 위해 한없이 눈물을 흘리셨을 그분들을 떠올리니, 그저 작품을 보겠다고 달려들었던 나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그래서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그분들을 위해 기도했다.
비단 삼청 공소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느 성지나 성당, 심지어 본당에서도 자신이 앉은 자리의 소중함을 잊고 지낼 때가 많다. 내가 앉은 그 자리에 어떤 분들이 어떤 사연으로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셨을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분이 누구든, 그분을 위해 기도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되새겨 보자. 혹시 내가 그곳에서 눈물 흘리며 기도를 바쳤을 때, 이후 또 다른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 신지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