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그의 삶

가톨릭 예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그의 삶

명동대성당의 표준영정화

2025. 0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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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에서 근무하다 보니, 행사가 있거나 미사 시간이 아니더라도 명동대성당에 들어가는 일이 종종 생긴다. 성당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차분해지는 느낌이 든다. 사제는 제대에서 미사를 집전하거나 성사를 집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명동대성당에서는 사제라도 제대 앞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경우는 드물다. 보통 일반 신자분들과 제단 아래에서 미사를 함께하다가 영성체할 경우에만 잠시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미사 시간이 아닌 때에 명동대성당에 혼자 들어가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은 명동에서 근무하는 특권을 누리고 싶어서다. 그 특권은 아무나 누릴 수 있지 않다. 단순히 미사 때나 혹은 더운 여름날, 무더위를 피해 시원한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거나, 유명한 장소이기에 순례를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이 어떤 곳인지 내가 어떤 역사적 장소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지, 내가 누구와 함께하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정확히 알 때 그 가치는 몇 배로 늘어난다.

 

명동대성당1898년 우리나라 천주교의 발상지로, 약현(종현)성당 다음 역사상 두 번째로 지어진 벽돌조 고딕 형태의 성당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성당에 들어가 누리는 특권은 조금 다르다. 우선 주님과 단둘이 마주할 수 있기에 힘들 때면 위로와 힘을 받기도 하고, 기쁠 때면 함께 기뻐해 주시는 분과 함께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한국의 다른 성당들과는 또 다른 의미 있고 훌륭한 성화들을 감상하며 한국 천주교의 역사와 위대함을 되새길 수 있다. 나는 그 특권을 더 잘 누리기 위해서 내가 존경하고 우러러볼 수 있는 분이 잘 보이는 곳에 앉는다. 바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영정 그림이 있는 곳이다. 바로 그분의 초상화가 명동대성당 안쪽 구석에 자리하고 있기에 오늘은 이곳에 있는 김대건 신부님의 유명한 성화와 그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1983, 문학진, 캔버스에 유채, 91×73cm, 명동대성당, 서울, 한국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삶

 

먼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보면, 그분은 충청남도 솔뫼에서 태어나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할 때까지 25년의 짧은 삶을 살았다. 1845년 한국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고 그 이듬해 처형됐다. 그리고 신부님은 1925년에 복자로, 1984년에는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바로 그 신부님의 표준영정화가 이곳 명동대성당에 자리하고 있다. 문학진 토마스 아퀴나스 화가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화다. 이 작품은 명동대성당 중앙 제단 왼편의 <79위 복자 제대와 복자화>가 자리한 곳의 오른쪽 상단에 함께 걸려 있다. 이것은 ‘103위 표준영정제작위원회의 수석 추진위원이었던 박희봉 이시도로 신부가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문학진 교수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성인화다.

 

이분의 또 다른 작품으로 <103위 순교 성인화(복자화)>가 있다. 1977년 작품으로 현재 서울 혜화동성당에 있다. 작가는 10개월에 걸쳐 전례, 역사, 복식 등 전문가인 오기선 신부, 유홍렬 박사, 석주선 선생 등의 자문과 한국의 주체성을 살려 순교자들 한 분 한 분의 표정을 특색 있게 표현하였다. 특히 도봉산 자락 한곳에 모여 시대와 신분을 뛰어넘어 주님 앞에 일치와 사랑으로 하나 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103위 순교 성인화

1977, 문학진, 유화, 285×330cm, 혜화동 성당, 서울, 한국

 

이 성화는 1977715, 김수환 추기경의 제막과 축성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후, 198456일 여의도에서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에 의해 ‘103위 순교 복자모두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이에 이 작품은 자동으로 <103위 순교 복자화>에서 <103위 순교 성인화>가 되었다. 제작 과정에서는 순교 복자들의 배치를 명동대성당의 <79위 복자 성화도(1926, 프랑스인 쥬스타니안 제작)>에서 참조하였다.

 

그런데 박성갑 교수가 외국인이 중앙에 있으면 한국의 주체성이 좀 부족해 보인다.”라는 의견을 받아들여, 중앙의 외국인 자리에 김대건 신부님을 모시고 김대건 신부의 자리에는 외국인을 옮겨 놓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79위 복자 성화도>에는 베드로 대성당을 배경으로 순교자들이 둥글게 모여 있으며, 그들 중앙에는 형벌 도구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103위 순교 성인화> 뒤쪽에는 도봉산을, 앞쪽 양옆으로는 순교와 열정을 상징하는 붉은 꽃을, 중앙에는 순결과 영혼의 깨끗함, 평화와 희망을 나타내는 흰 꽃들을 배치하여 더욱 완성도를 높였다. 1977년 작품이라 그림 속 인물들에게는 아직 후광이 그려져 있지 않다.

 


 

표준영정에 드러난 사제의 정체성

 

당시 표준영정제작위원회는 시복 시성 운동의 일환으로 당시 시복 시성 후보자 103위의 표준영정 제작을 위해 1983년에 조직되었다. 그리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성인화는 198456일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기념하여 내한한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에 의해 축성되며, 한국 천주교회 공인 표준영정 1호가 되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초상화는 최근 발견된 1920년대 장발 루도비코 화가의 작품 등을 포함하여 이전에 이미 여러 점이 그려졌다. 장발 화가는 오늘 작품과 비슷한 조선 시대 복식을 한 모습으로 신부님을 묘사했다. 하지만 1971년 동양화가 정채석 비오 화가가 그린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이 작품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정채석 화가의 작품은 혜화동 대신학교와 미리내 성지 및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분리 보관되어 있던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를 모아 계측한 후 그 결과를 토대로 당시 복자화를 제작하였다. 그런데 신부님을 두루마기에 갓을 쓰는 조선 시대 정통 복식이 아니라 수단을 입고 모관을 쓴 사제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역사적 복식을 중시하기보다 사제의 정체성에 더 무게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감상하는 문학진 화가의 작품은 역사성과 사제의 정체성과 같은 다양한 요소들을 골고루 표현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김대건 신부님이 사목 활동하던 시기는 박해 시기였기에 정식 사제 복장보다 위태로운 상황을 대비하여 일상복을 입으시고 활동하셨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김대건 신부님에게 한국 양반의 복식을 갖추게 함으로써, 그분의 당시 신분과 가문에 대한 인간적 상황도 표현하고 있다.

 

신부님은 새하얀 두루마기에 붉은색 영대를 한 채 십자가를 쥐고 손에서 성경을 놓지 않고 계신다. 밝게 빛나는 흰색 순결과 영광 그리고 천상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우리나라에서는 고귀한 죽음을 의미한다. 세상을 떠난 이에게 하얀 수의를 입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붉은색은 하느님에 대한 열정과 사랑, 순교를 나타내기에 현재에도 순교 기념일 미사에 사제들은 붉은색 영대를 착용한다. 또한 김대건 신부님은 오른손에 십자가를, 왼손 역시 성경에 그려진 십자가 위에 손을 얹고 계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겠다는 간곡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동시에 십자가를 쥐고 있음은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겠다는 의지, 성경에 손을 얹음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순명을 의미한다. 오른손 아래로 보이는 묵주는 성모님께 당신의 바람을 간구하여 주시기를 청하는 겸손함을 드러낸다.

 

신부님의 뒤로 굉장히 험준해 보이는 산은 도봉산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산의 형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같이 앞으로 닥칠 자신의 앞날을 예고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험난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쉼 없이 복음을 전하고 순교한 그의 사목적 열정도 함께 보인다.

 


 

김대건 신부님의 편지 이야기

 

김대건 신부님은 25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다. 사제로서 지낸 시간은 1년 남짓이었으며, 실제로 활동한 기간은 6개월여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에도 열정적인 활동으로 다양한 업적을 남기셨다. 그분의 열정적인 믿음과 활동은 나에게는 사제로서 선배이자 믿음의 본보기로 큰 감동을 느끼게 하였다.

 

특히 그분이 남기신 21통의 편지 속에는 감히 내가 따라가지 못할 만큼의 믿음과 사랑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신부님이 남기신 편지는 번역되어 책으로 출간되어 있다. 처음 그분의 서한을 읽었을 때는 참 대단한 분이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다른 성인전을 읽을 때와 비교하여 또 다른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저 역시 우리 신부님!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는 달라도 달라! 이렇게 대단하신 분이셨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내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 있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재직할 당시, 고문서고 담당 선생님이 신부님 첫 번째 서한 원본을 나에게 보여 주시며 신부님 이거 아세요? 김대건 신부님은 서한 마지막 서명을 자주 이렇게 쓰셨어요.”라고 알려 주신 것이 발단이 되었다.

 

분명 번역된 책에도 수차례 나오는데 왜 그때까지 알지 못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그래서 그 원문 일부를 보여 드리고자 한다. 신부님 서한 중 가장 마지막 부분으로, 가운데의 오른쪽 두 줄, 신부님의 서명 부분이다. 이 부분에는 서한 마지막 부분인 신부님의 서명 그리고 장소와 날짜가 적혀 있다. 본문도 아닌 단지 그분의 서명이 왜 내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다시 한번 느껴 보고자 한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첫 번째 서한

 

Paternitati vestrae

And. ind. filius [Andrea indigena filius]

Kimaykim

Manila die 28 febriarii[februarii]

anno 1842

 

번역서에 따르면, “공경하올 스승님께 부당한 아들 김해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특별히 내가 충격받은 것은 Kimaykim(김해 김)이라는 표현이다.

 

당시 조선에서 천주교가 배척받고 억압받았던 가장 큰 이유 가운데에는 가문을 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서명 속에는 신부님의 인간적 정체성과 가문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올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부님은 자신의 가문이었던 김해 김()’이라는 인간적 소속감과 자랑스러움, 사랑을 그대로 자신만의 방법으로 드러낸 것이다. 자신이 가문을 버린 것도 아니요, 가문을 사랑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의 가문을 자랑스러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도 크기에 그분을 위해 살고, 그분을 위해 죽음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신부님은 21개의 서한 속에서 자신의 신앙 고백을 이 한 글자(김해 김)’에 담아 보여 주고 계신다. 어찌 이분을 높여 공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제 명동대성당에서 나만이 아니라 모두 함께 신부님을 우러러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하느님께 사랑의 다짐과 나만의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한다.

 

Profile
서울대교구 사제. 교황청립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교회문화유산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이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예술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회 문화유산의 보전과 교회 예술의 진흥을 위해 힘쓰며,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한 교회 예술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주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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