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급변하는 현실 앞에서 불편함을 느낍니다. 세상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바라는 것, 믿는 것, 그리고 찾는 것에서 깨어나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마치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말하지만, 정작 마음속 깊은 갈망에 대해서는 단 한 줌도 해명하지 못합니다. 밤을 지새우며 찾아 헤맨 영원에 대한 갈망, 사랑에 대한 소망을 세상은 유치한 퇴행으로 치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유 없이 불안합니다. 하루를 잘 마무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울합니다. 이런 불편한 감정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이 감정이 계속되면, 그 시작조차 잊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두려워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결국 ‘두려움’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새로운 하루를 기뻐하기조차 어려워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감정들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두려움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불편한 감정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느님께서는 왜 이런 불편한 감정을 허락하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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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성서 본문이 있습니다. 바로 마태오 복음서 14장 22절에서 33절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센 바람과 파도 앞에서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어느새 죽음이 그들의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의지할 수 있는 스승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제자들만 성난 호수 위에서 밤새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두려움 앞에 모든 것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배에 오르기 전,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이름 없이 모였던 사람들이 빵을 풍족히 나누는 놀라운 표징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그들을 덮치자, 불과 몇 시간 전의 그 경이로운 경험조차 잊었습니다. 제자들은 짙은 어둠을 마주하며, 요동치는 배 위에서 떨었습니다. 그리고 뒤덮인 어둠만큼이나 깊은 두려움을 각자 외롭게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한밤중, 꿈처럼 아련한 모습으로 그들 앞에 서십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건네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제자들과 맺은 따뜻한 관계를 기억하게 하시며, “나다.”라고 스스로를 알리십니다. 그 순간, 제자들 중 베드로가 용기를 냅니다. 두 눈으로 주님을 확인하고, 두 손으로 그분을 붙잡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말씀을 건네십니다.
“오너라!”
이 한마디는 베드로의 마음속 두려움을 없애고,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물 위를 걷게 됩니다. 그러나 그 용기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거센 바람을 보고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나중에 스승의 십자가 앞에서도 반복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끌려가실 때, 몰래 따라가면서도 끝내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결국, 닭이 울던 새벽에 자신의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베드로는 또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하지만 호수 위의 그때처럼, 그때에도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 주십니다.
베드로의 두려움은 어리석은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두려움이 주님의 손길을 불러왔습니다. 그의 용기가 그를 걷게 했고, 그의 두려움이 주님의 손을 붙잡게 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두려움을 단순한 두려움으로만 부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손을 부른 복된 두려움입니다. 그의 두려움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의 두려움이 있었기에 주님의 구하심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용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보살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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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우리를 멈춰 세웁니다. 의심하게 하고, 주저하게 만듭니다. 익숙한 것조차 낯설게 하며, 올바른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스스로 고립되게 만듭니다. 그런데 두려움에 대한 이런 판단을 바꿔서 말할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은 정신없이 내달리던 우리의 발걸음을 멈춰 세웁니다.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가 가던 길이 올바른지 되새기게 합니다. 사람들 속에서 잊고 있던 ‘나’를 찾게 합니다. 지금 가는 방향이 맞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다시 결정하게 합니다. 익숙한 반응을 낯설게 만들어, 그것이 진정 우리가 원하는 것인지 스스로 묻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피하고 싶고, 마주하기 싫은 두려움은 결국 저주를 닮은 축복입니다.
물론, 두려움 때문에 익숙한 것들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애써 쌓아 온 것들,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루고자 했던 것들의 의미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 덕분에 그 순간 우리는 익숙한 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미처 듣지 못했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됩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축복입니다. 두려움은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내 안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는 고통도 사실은 거친 포장지에 싸인 주님의 선물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감정들과 다투지 않습니다. 그 불편한 감정들을 고통의 근원으로 여기며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그 감정들은 결코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우리 내면에 숨겨진 고통의 열매이며, 우리가 다시 바라보고 극복해야 할 것들을 비추는 그림자입니다. 불편한 감정은 싸워서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주해야 할 ‘우리의 감정’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미뤄 왔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라는 ‘주님의 손 내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