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시간의 흐름이, 일 년의 진행이 다르다는 걸 알고 놀랐던 적이 있다. 가톨릭에서 새해는 이미 시작되었다. 지난 11월 30일부터가 우리에게는 ‘새날들’이다. 그리스도교의 많은 것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한 해의 일들 역시 예수님 생애와 구원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처음 성당에 다닐 때 나는 미사 전례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한동안 관찰한 끝에 이야기의 ‘재현’이구나 하고 납득한 적이 있다. 창조와 말씀과 희생과 부활의 서사가 매 주일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 재현에 스며들어 가는 과정이 미사이고 신자로서의 한 해의 여정이라고 생각하자, 더 이상 어렵지 않았다.
전례력에서 1월 1일은 성 안드레아 축일과 가까운 주일부터 시작한다. 안드레아 성인은 열두 사도 중 한 분으로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안내하기도 했다. 원래 직업은 어부였고 11월 30일을 축일로 지낸다. 그러니 올해는 축일과 대림의 시작이 같았다.
새해 첫날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섰더니 밖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마음에도 무게를 잴 수 있다면 주일이 지나고 월요일 오후부터 내 마음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져 주일이면 거의 물에 젖은 담요가 되어 있다. 평소에는 그렇게 젖은 상태로 살다가 성당으로 가면서는 그 축축한 마음들을 돌아보게 된다. 한 주 동안 마음속으로 처단해 버린 이들을 떠올리며 내 옹졸함에 실망하기도 하고 여전히 용서되지 않는 일들 때문에 골똘해지기도 한다. 이럴 때는 빵집의 환한 내부 불빛조차 불평의 대상이 된다. 너무 환한 것들을 보면 상대적으로 내 안의 어둠이 잘 드러나니까.
잠깐 마음이 반짝일 때도 있다. 내리막길을 걸어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느티나무 아래 서게 되는데, 그럴 때 올려다보는 나무는 늘 담담히 자기 계절에 맞는 일을 하고 있다. 지금은 단풍들을 하나하나씩 떨어뜨리는 중이다. 내년에는 내년에 맞는 새잎들이 날 테니까 그건 손실이나 상실과는 거리가 먼 행위.
자연의 질서를 닮은, 간소하고 단순한 삶을 살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한 해 동안 너무 정신없이 살았다. 그리고 최근에는 지인에게 그게 일종의 ‘심리적 도피’일 수 있다는 충고도 들었다.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그렇게 바빠야 했을까? 왜 그렇게 밀어붙였을까. 이쯤 되면 담요의 무게는 다시금 우상향하고 마음은 상당히 고달파진다. 나무들의 어떤 생김생김도 그 낙담을 막지 못할 만큼.
그래도 일단 성당에 들어가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의 일부가 되고 이야기를 간직한 사람이 되는 그 시간은 볕을 쬐는 것처럼 아늑하고, 위축된 마음의 네 귀퉁이도 팽팽해진다. 물론 요즘은 그 효과가 월요일까지만 겨우 가는 듯하지만. 괜찮다. 미사는 돌아오고, 하느님께서는 늘 기다리시니까.
전례 시기 중 ‘대림’이 가장 좋다는 생각
그날은 성당에 대림초가 켜져 있어서 작년에 대모님께 선물받은 예쁜 초들을 떠올렸다. 성탄절이 오기까지 한 주에 보라, 연보라, 장미색, 흰색 이렇게 하나하나씩 켰던 기억을. 마치 몸에 난 상처가 낫는 과정과 같지 않은가 싶었던 색의 변화들. 의식이나 전례가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정말 거기에 들어맞는 색들이었다.
그날 강론은 대림에 관한 영상 자료였다. 신부님이 감기가 심해 강론이 어려우셨던 것이다. 신부님은 “그러면 강론이 짧을 거라 여러분은 기대하시겠지만……” 하시더니 와병 중에도 마련한 영상 자료를 트셨다. 화면을 잘 보기 위해 조명을 껐는데, 곧 다가올 성탄 미사 때처럼 그 어둠이 꽤 좋았다.
영상을 보며 나는 전례 시기 중 ‘대림’이 가장 좋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매번 기다릴 수 있고 그 기다림의 끝을 알고 있어 좋다고. 대림 4주가 되면 어김없이 성탄절이 되어 우리의 기다림은 명확한 결실을 맺을 수 있으니까. 물론 시간은 다시 돌고 돌아 우리의 아기 예수님은 수난을 겪고 인간의 무지와 몰이해 속에 고통을 겪게 되시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이야기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을 위한 것임을 안다. 그러니까 매번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로써 그리스도인의 시간은 흐르는 것이다.
미사가 끝나고 나는 어느새 성가를 흥얼거리며 성당 밖으로 나왔다. 주여 나의 몸과 맘 모두 드리오니 주여 나의 몸과 맘 모두 받으소서 어둠 속에 빛을 그리던 양들 당신의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주여 나의 몸과 맘. 무겁고 잿빛인 마음을 성당 안에 두고 나오며 어느새 콧노래까지 부르는 나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어렸을 때도 나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있지도 않은 노래를 지어 부르는 아이였다고 들었다. 엄마와 어디를 가다가 옛 동네 분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분이 나를 가리키며 “온종일 노래지어 부르던 애 아이가?” 하시는 바람에 알게 된 일이었다. 노래를 부르며 어디를 걷는 일은 어른이 되면서 거의 사라졌다가 성당 다녀오는 길의 버릇으로 되살아났다. 온전한 자기 기쁨에 빠져 있어도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일까.
4주 후에 오실 예수님 말고는, 더 바랄 것이 없는 마음
그날은 슈퍼에 들러 어떤 찌든 때도 제거해 준다는 스펀지를 샀다. 집 청소를 제대로 못 한 지 꽤 되었다는 걸 안다. 그렇다고 사람을 불러 치우고 싶지는 않다. 스스로 해낼 수 없을 만큼의 살림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니까, 그렇게 해결하기보다는 내가 가질 수 있는 만큼만 가지는 쪽으로 해결하고 싶다. 이런 이유로 집은 영영 깨끗해지지 않는 것인데 그래도 여전히 노력의 여지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반찬 가게로 건너가 일용할 반찬에 더해 과자를 샀다. 그 또한 배달 음식을 줄이겠다는 나름의 결심이었다.
“이거 맛있어요?”
계산하는데 반찬 가게 직원분이 말을 걸었다. 요즘 푹 빠져 있는 김과자였다.
“네, 저 완전히 중독됐어요.”
“그랬구나! 발주 안 하려다가 했는데 잘됐네요!”
“그래요? 다행이다!”
그렇게 해서 그런 것, 콩나물무침과 시금칫국 그리고 김과자 같은 뭐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것들을 들고나오는데, 문득 내가 다행이라고 말을 하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세상 뭘 갖다줘도 펴지지 않을 것처럼 잔뜩 인상을 쓰며 성당에 갔는데, 지금은 다행인 마음이 됐네. 바랄 것이 없게 됐네, 4주 후에 오실 예수님 말고는.
아파트 후문으로 들어가 완전히 어두워진 화단 길을 걸으면서 나는 갈 때와는 다르게 오히려 내 편에서 고요히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