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신도를 위한 교의 신학 가이드> 시리즈의 아티클로, 이 글은 “신학이 살아 숨 쉬는 이유”에서 이어집니다.
망설임의 순간, “식사 전 기도를 하시나요?”
질문은 단순합니다. 그런데 막상 일상에서는 이 단순한 질문이 의외로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직장에서, 모임에서, 혹은 낯선 사람들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할 때, 손을 모으고 조용히 기도하는 그 몇 초가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무신론적 분위기라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종교적인 행동’은 사회에서 눈에 띕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앙인은 자꾸 눈치를 보게 됩니다.
“기도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냥 안 하는 게 편하겠다!”
신앙인은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선택을 합니다. 결과를 위해 과정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 가는 것을 거듭하다 보면, 이는 어느새 마음의 습관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앙을 조용히 접어 두는 방식을 통해 얻는 편안함이, 우리의 삶을 만족시켜 줄까요?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요?
어떤 일을 지속하려면, 결과보다 먼저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동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신분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한 확신이 충분히 자리 잡을 때, 신앙이 주는 어색함과 부담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요?
“성령의 담지자”
한 가지 가정을 해 보겠습니다. 만약 내 주변 사람이 모두 가톨릭 신앙인이라면, 훨씬 편하게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식사 전 기도를 해도 이상하게 보지 않을 것이고, 신앙 이야기를 꺼내도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를 떠올려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기나긴 교회의 박해가 끝나고,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에도,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국교화되었을 때에도, 개인의 복음화 과제가 면제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묘한 유혹과 더 깊은 내적 갈등이 생겨났습니다. 겉으로는 편안해 보였지만, 마음속에서는 더 치열한 영적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사회적 이득을 위해 갖게 된 신앙은 신앙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법입니다.
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삶을 식별하며, 더 깊은 영적 투쟁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들은 영적인 전투가 어렵다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마음 안에는 믿음이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섭리 안에서 인간의 숙명과 운명을 해방시켜 주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세례를 받는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해 ‘새로운 인간’이 되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이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고백하고,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세례받은 모든 이가 성령의 거처가 되었다는 뜻이며,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은 단순한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한 인간이 하느님께 존재의 신분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도 던질 수 있습니다.
평신도란 누구인가요?
“세상 안에서 영혼이 되어 숨 쉬는 사람들”
평신도(平信徒, Laity)를 뜻하는 그리스어 ‘라이코스’(λαϊκός)는 ‘백성(λαός)’에서 유래했습니다. 성경에서 이 백성은 이방인과 구별되는 ‘하느님 백성’을 의미합니다. 교회 헌장(31항)은 평신도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성품의 구성원과 교회가 인정한 수도 신분의 구성원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이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이해된다. 곧 세례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하느님 백성으로 구성되고,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에 자기 나름대로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 그리스도교 백성 전체의 사명 가운데에서 자기 몫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닌 사람’이라는 부정이 아니라,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는 긍정입니다. 성품된 자와 수도자는 직무상 거룩한 교역에 임명되고, 세속과는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반대로 세상에만 관심을 가지며 하느님을 멀리하는 무신론적 방식의 삶을 택한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신도는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요?
평신도는 세속 안에서 현세의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직장에 다니고, 가정을 이루고,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복음을 증언하고, 세상을 성화하는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평신도는 ‘세상 밖으로’ 물러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에서, 주변부가 아니라 세상의 중심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공의회 문헌이 “영혼이 육신 안에 있는 것처럼 평신도는 세상 안에서 그 영혼이 되어야 한다.”(38항)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평신도는 주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의 증인이 되어야 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표지가 되어야 한다고 초대받습니다.*
* 참조: 다리오 비탈리, 《인류의 빛은 그리스도이시다》, 서한석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6, 129-147쪽.
의무를 넘어, 존재의 빛으로 살아가기
그리스도인이자 평신도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 단체에 가입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문화 전통이나 윤리의 신비를 성령의 힘으로 지켜 내는 사람들입니다. 홀로, 내 의지로 수행해야만 하는 규율의 이행자가 아니라, 성령의 힘을 믿고 자신을 그분께 의탁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만드시기보다, ‘백성이라는 공동체’를 통해 거룩함으로 부르십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이들이 보편적 성화로 부름받았다는 사실(40항)은, 거룩함이 일부 특별한 이들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의 일원인 이 평신도는 성직자와 수도자 사이에 다리를 놓는 단순한 조력자가 아닙니다.
평신도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복음을 살아 내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일을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그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평신도가 가진 품위입니다. 그리하여 평신도는 각자 고유한 은혜와 임무에 따라,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사랑으로 살아 있는 신앙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식사 전 기도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낼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질문을 단순히 ‘선택’의 문제로 남겨 두면 우리는 늘 상황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분위기가 좋으면 하고, 어색하면 피하고, 익숙해지면 무감각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인 평신도라면 이 문제는 선택의 갈림길에 머물지 않습니다. 남들 앞에서 하는 작은 신앙적 표현은, 세상 안에서 내가 어떤 신분으로 살아가는지 다시 확인하는 순간으로 다가옵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표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내 자리를 다시 찾는 짧은 고백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평신도로 세상 안에서 조용히 빛나는 삶의 방식을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다음 화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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