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더 가져와! 술!"
오늘도 여전히 헤로데 궁은 술과 향락으로 가득 차 있다. 헤로데는 술에 취하면 아무도 말릴 수 없다. 맨정신에도 보통 성미가 아닌데, 그는 술에 취하면 더욱 감정적이 되어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 문제는 술김에 내뱉은 말도 명령이 된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이 하루아침에 저 술주정 때문에 허무하게 처형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도 즐겼던 이 연회 음악은 그때 이후로 그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소음처럼 들렸다.
이 지옥 같은 연회가 언제 끝날지 몰라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굴렀으나, 헤로데의 술잔치 중간에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왕실 관리인 내게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아들은 지금 어떤 상황일까. 아직도 집에서 나올 때 들었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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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고열은 내려갈 기미가 없었다. 그래도 어제까지는 울면서 계속 아픔을 호소했는데, 오늘은 그럴 힘마저 없어 보였다.
“여보 어떡해요, 아이가 많이 심각해 보여요.”
30살이 넘은 늦은 나이에 어렵게 이 아이를 얻었다. 천신만고 끝에 왕실 관리로 발탁된 나는 이 아이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장밋빛 희망은 갑자기 찾아온 아이의 병환으로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아이는 평소에 그토록 좋아했던 무화과나무 열매조차 입에 못 댄 지 오래다.
“일단 왕실 의사에게 다시 한번 요청해 보겠소. 좀만 기다려 주오. 어떻게 해서든 그를 데려오겠소.”
불가능한 약속임을 알면서도 아내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고는 눈물을 삼키며 서둘러 왕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정무가 시작되는 시간보다 더 일찍 도착했는데, 왕실 의사가 먼저 와 있었다.
나는 왕실 의사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아들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으니 아들이 죽기 전에 한 번만 같이 가달라며 애원했다. 그러나 왕실 의사는 왕실 예법과 헤로데의 종잡을 수 없는 성미를 이유로 부탁을 거절했다. 자신도 아들이 있다는 그의 마지막 말에 나는 그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를 붙잡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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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는 매일 술에 찌들어 살면서도 자신의 건강을 끔찍이 챙겼다. 그는 그저 하루라도 더 오래 살려는 마음뿐이었다. 왕실 의사는 그가 전국을 뒤져 찾은 가장 빼어난 의사였는데, 24시간 내내 자신만을 돌보아야 했다. 잠을 자다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건강이 염려되면 그를 불러 의미 없는 진찰을 받고 돌려보내곤 하였다.
내 능력이 닿는 한 뛰어난 의사를 이곳저곳에서 찾아 아들에게 데려갔지만, 그들은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아이의 고통은 하루가 다르게 심해졌다. 나는 그때부터 하느님을 찾기 시작했다. 하느님을 잊고 지내 왔는데, 이제 매일 밤 고통에 잠을 못 이루는 아이의 손을 잡고 이 아이를 살려 달라고 기도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수많은 표징을 행하셨다는 예언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세례자 요한이 떠올라 그 예언자라면 내 아들을 살려 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왕실 정보원에게서 그분이 얼마 전까지 사마리아 지역에 계셨으며, 하룻길 거리에 있는 카나 지역으로 오실 것이라는 정보를 들었다. 나는 정확히 어느 날, 몇 시쯤 그곳에 도착하실지 물었다. 시간이 없었다. 지도 보는 법도 잘 몰라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왕실 군무관에게 지도 보는 법을 속성으로 배웠다. 다행히 예전에 왕실 창고에 버려져 있던 낡은 지도를 얻었던 터라, 나는 그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헤로데에게 아들이 죽어 가고 있으니 마지막에 곁을 지켜야겠다는 구실로 어렵게 휴가를 얻어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웬만한 사유로는 허락하지 않을 그였기에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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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저희도 같이 갈까요?”
“아니다. 내가 직접 가 봐야겠다. 아이를 잘 부탁한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그때 내게 알려 다오.”
많은 고민 끝에 나는 혼자 카나로 향하기로 하였다. 혼자 긴 여정을 떠나는 것이 처음이라 불안하기도 하였으나, 사람이 한두 명이라도 더 따라오면 그만큼 속도가 느려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분을 직접 뵙고 싶었다. 아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낡은 지도와 물 한 병, 이틀치 식량과 돈을 챙겨 발걸음을 옮겼다.
정확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이 시간 그분은 어느 곳에 계실지, 끊임없이 지도를 확인하고, 생각하면서, 초조한 걸음을 옮겼다. 한 손에는 지도를 들고 그분의 경로를 계산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그분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지 물어봐야 했다. 걷는 내내 누워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았던 그날을 생각하며 하느님께 끊임없이 기도를 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분을 본 적이 있다는 사람을 만났다. 너무나 감격해 내 수중에 있던 모든 돈을 그에게 쥐여 주고 그분이 오실 장소로 가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이윽고 멀리서 그분이 다가오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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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그분 말씀대로 정말 살아 있을까?
아들은 지금 어떤 상황일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하루 종일 아들 생각만 하느라 이 길을 얼마나 걸었는지조차 잊었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는데, 식량과 돈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모두 줘 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던 중 저 멀리서 종들이 나를 향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가쁜 숨을 고르며 말을 잇는 종들은 그분 말씀처럼 아들이 살아 있음을 알렸다.
이로써 나는 다시 무화과를 먹을 수 있게 된 아들과의 행복한 시간을 되찾았다. 아들을 살려 주신 하느님, 그리고 그분의 예언자이신 예수님을 믿게 된 후, 우리 집엔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행복이 찾아왔다.
그러나 어느 날, 그분께서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빌라도에게 넘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다시금 올라왔다. 정신을 못 차리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재판을 헤로데에게 넘기기로 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지금 그분께서 이곳으로 오고 계시다는 것이었다(루카 23,6-12). 불안함과 초조함에 입술이 떨렸다. 이렇게 그분을 다시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상상은 꿈에서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쇠사슬에 묶여 이곳으로 들어오신 그분이 보였다.
헤로데는 그분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며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분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죽은 사람도 살리셨냐는 헤로데의 질문을 받은 그 순간 그분은 나를 말없이 바라보셨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력하게 다시 왕실을 나가신 그분의 뒷모습을 보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분이 나가시자 헤로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다시 술잔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연회 음악이 다시 들리는 순간 나는 그 고통스러운 소음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
그로부터 두 달 정도가 지났다. 돌아가셨다는 그분을 다시 봤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나는 건강해진 아들의 손을 잡고 그들이 이룬 공동체를 찾아갔다. 하지만 사람들이 헤로데에게 속한 나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좀처럼 마음을 열어 주지 않았다. 나는 오랜 고민 끝에 그 소음 가득한 방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저는 이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기에, 떠나야겠습니다.”
“왜?”
“임금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지만, 지금 제게 주어진 제약이 너무 많습니다. 이 일은 저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이에게 넘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평소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 데 익숙해서인지, 다행히 헤로데는 내가 말하는 ‘임금님’이 내 아들을 살리신 그분임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가 나를 무시하는 버릇이 오늘만큼 다행인 날이 있었을까. 헤로데는 소리를 지르며 나를 궁궐 밖으로 내몰았다. 나는 평소 같았으면 겁에 질렸을테지만, 이번엔 아무 말 없이 헤로데에게 묵례를 하고 나왔다.
왜냐하면 그날 나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분 덕분에 모든 것이었던 아들을 되찾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