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쓰고, 일어서기

영성과 신심

계속 쓰고, 일어서기

삶을 일으키고 방향을 보여 주는 글쓰기의 힘

2026. 0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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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덜 떨리는 손으로 무선 이어폰을 집어 귀에 꽂았다. 마치 외화 속 주인공이 약통에서 약을 꺼내 물도 없이 삼키는 것처럼 절박한 손놀림이다. 스마트폰으로 노래를 재생하고 볼륨을 최대로 높인다. 첫째가 내는 으아아악!” 소리가 시끄러운 음악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아이가 짜증을 내며 점점 흥분하다가 결국 제 분을 이기지 못할 때 나오는 괴성이다.

 

그 괴성이 마치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나를 찌르는 것처럼 내 몸 여기저기가 아파 온다. 두통에 이어 곧 눈알이 빠질 것만 같다. 구역감이 몰려온다. 안 되겠다. 잠깐 피신해야겠다 생각하는 순간 거실에 앉아 엄마와 형을 번갈아 쳐다보는 둘째와 셋째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TV를 켜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 영화를 재생한 다음 둘째 손에 리모컨을 쥐여 주고 말했다. “엄마 잠깐만 나갔다 올게.” 둘째와 셋째는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한다.

 

재빨리 노트북 가방과 텀블러를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1층으로 내려와 아파트 현관 밖으로 나가는 순간, 노랗게 물든 강렬한 햇빛이 한꺼번에 쏟아졌고, 그러면서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는지 눈물이 났다. 공공장소가 아닌 나만의 공간이 간절한 순간이다. 지하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 황급히 들어가 울었다. “흐어엉……하고 울다가, 누군가 들으면 놀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울음소리를 음소거 모드로 전환하고 조용히 있었다. 신기하게도, 소리를 죽이니 눈물이 잦아들었다.

 

씩씩하게 차 문을 열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일할 때 자주 가는 집 근처 카페로 향했다. 평소 잘 먹지 않는 새콤달콤한 차를 주문해서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집을 나설 때보다 상태가 훨씬 나아진 내가 보인다. 눈이 빠질 듯한 느낌도, 두통도, 구역감도 사라지고 없다. 위장에 은은한 통증이 있지만 곧 잠잠해질 것이다.

 

첫째랑 내 사이에 벌어진 이 사건을 곱씹어 봐야겠지만, 지금 당장은 할 수 없다. 남편의 조언도 듣고 싶지 않다. 머리와 손가락을 바쁘게 하지 않으면 생각이 내 의지와는 다르게 뻗어 갈 것이고, 마음도 아플 것이다. 그래서 노트북을 열고 빈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곱씹으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방금까지의 장면을 자세히 기술했다. 관객이 된 기분이다. 이제 그만 좀 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었던 격한 감정이, 마치 거품이 사그라들듯 조금씩 줄어들더니 납작해졌다. 그저 비일상적인 순간을 겪은 것뿐이다. 별일 아니다. 여기 조금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 다시 일상으로,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몇 개월 전, SNS에 올린 글의 일부다. 이날 큰애가 수학 문제집을 풀기 싫어서 투정을 부리는가 싶더니 괴성을 내며 울부짖었고, 나도 견디기 힘들 만큼 화가 났지만 같이 소리를 지를 수는 없으니 집 밖으로 피신했다는 이야기다. 카페에서 노트북을 켜고 방금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려고 애쓰는 동안, 폭풍우가 몰아치던 가슴속이 잠잠해졌던 기억이 난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읽어 본 적은 없지만, 여기에 나오는 이 구절만큼은 알고 있다. 확실히 효과가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기

 

많은 작법서가 그렇듯, 나 역시 글쓰기 수업 함께 쓰는 기쁨을 진행하며 글을 쓸 때는 설명보다 묘사에 더 집중해 보자고 제안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하려 하지 말고, 기억에 남는 장면을 덤덤하게 묘사하자고. 마치 소설의 한 장면을 들려주듯 말이다. 주인공 역할에서 빠져나와 관객이 되면 같은 사건이라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나는 매주 다른 주제로 글쓰기 숙제를 냈고, 수강생들은 주제가 무엇이든 주로 과거에 일어났던 고통스러운 기억을 더듬어 글의 소재로 삼곤 했다. 한 분은 어린 시절, 친척이 흉기를 들고 난동을 부린 사건을 글로 옮긴 후 수업 시간에 낭독했다. 다른 수강생들과 나는 마치 소설 속 한 장면을 듣는 것처럼 그분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분은 말했다.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 적은 있지만, 누구의 잘잘못인지 말하지 않고 이야기한 건 처음이에요. 근데 왜 이렇게 후련하죠?”

 

우리에겐 판관이 필요할 때가 있고 무대가 필요할 때가 있다. 글쓰기는 판관 역할을 할 수 없지만, 무대가 될 수는 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단 관찰해야 한다. 지금 벌어지는 일, 혹은 수십 년간 마음속에 몇 번이고 재생했던 그 일을 다시금 무대에 올려서 구석구석 자세히 살펴본다.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들어온다. 상대방이 어떤 표정을 지었고 어떤 말을 삼켰는지, 당시 내 몸은 어느 쪽을 향하고 있었는지, 바깥 날씨가 더웠는지 서늘했는지, 햇빛은 어느 각도로 들어오고 있었는지.

 

장면을 상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미 익숙한 일인데도 새롭게 느껴진다. 잘 아는 일이 이토록 새롭게 다가올 수 있다니. 무대로서의 글쓰기가 갖는 효능이다. 모호한 감정으로 덩어리진 채 걸려 있던 것이 비로소 잘게 분해돼 쑥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우리가 어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괴롭게 하는 대상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글쓰기, 잿더미를 헤집는 작업

 

불이 활활 타오르는 동안 불길에 손을 대서 만질 수는 없지만, 빨간 불꽃이 사그라들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재로 변한 뒤 우리는 그것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재를 흩뜨려 보며 타지 않고 남은 게 뭔지 확인할 수도 있고, 재를 한군데로 모아 낮은 언덕을 만들 수도 있다. 작은 용기에 재를 옮겨 담는 것도 가능하다. 불에 타기 전엔 크고 무겁던 것이 불에 타 버려 작고 가볍게 변한 것이다. 다시 꺼내 볼 엄두도 나지 않았던 것을 이제는 찬찬히 살펴볼 수 있게 된다. 내가 겪은 일이 그제야 비로소 내 것이 된 기분이 든다. 이렇게 재를 헤집는 작업이 바로 글쓰기다.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 삶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글을 쓴다고 해서 내 인생에 벌어질 일을 미리 알고 대비하거나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만들 순 없지만, 삶이 내게 남긴 것들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폐허와 잿더미 속에서도 질서를 찾게 한다.

 

우리는 인생에서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내가 지금 잘하는 건지, 뭔가 실수하지는 않았는지 매 순간 궁금하지만 아무도 답을 알려 주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도 과묵하시기는 마찬가지다. 때로 하느님의 대답을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만난 분이 하느님인지 우리 자신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내가 방향을 가늠하는 방법은 글쓰기였다. 글을 쓴다고 해서 갑자기 지혜로워지거나 풀리지 않던 문제의 답을 알게 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계속 쓰기로 결심하는 것은 삶이 여전히 막막하기 때문이다. 한고비를 넘기면 다시 나타나고는 하는 이 막막한 골짜기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글을 쓴다.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넘어지더라도 덜 아플 것이다. 그리고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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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cpbc 라디오 작가. 라디오 작가가 된 이후 10년 넘게 매일 글을 써 왔습니다. 글쓰기는 때로는 숨 막히게도 하고, 때로는 유일한 숨구멍이 되기도 했습니다. 글을 통해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은총의 순간들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글을 쓰건 쓰지 않건 은총은 주어지겠지만, 내가 은총을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삶보다 훨씬 낫다고 믿습니다. 여전히 글쓰기는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지만, 제 글을 통해 글쓰기에 매혹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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