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AI 시대, 인간다움을 묻다> 시리즈의 아티클로 ‘인간의 지능, 기계의 지능’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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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곧 맞이할지도 모르는 강인공지능 시대. 🤖 🧡 기계가 아무리 똑똑해져도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고유한 지혜와 마음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AI 시대에도 변치 않는 인간다움과 사랑의 깊이가 가진 가치를 함께 살펴봅니다. |
약인공지능과 강인공지능
지난 시리즈의 글들을 본 뒤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약인공지능(Weak AI)의 이야기 아닌가? 만약 강인공지능(Strong AI) 시대가 온다면 기계의 지능이 현재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능력까지 소유하게 되지 않을까?
먼저 약인공지능과 강인공지능을 정리하자면, 약인공지능은 특정 목적에 특화된 인공지능으로 주어진 데이터나 통계적인 패턴을 인식함으로써 결과를 내놓는다. 반면 강인공지능은 인간 수준의 지능을 의미하며, 새로운 문제에 스스로 지식을 적용하고 주제를 확장하며 의미를 이해하고 추론하며 상황을 판단할 수 있다.
즉, 약인공지능이 특정 과제를 매우 잘 수행하도록 설계된 도구적 지능이라면, 강인공지능은 인간처럼 다양한 과제를 이해하고 학습하며 추론할 수 있는 지능인 셈이다. 현재까지의 모든 AI 기술은 약인공지능에 머무르고 있다.
설사 생성형 인공지능이 창의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온라인에 있는 자료들을 종합한 것이며 일종의 학습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것뿐이다.
강인공지능 시대는 언제 올까?
그렇다면 강인공지능은 언제쯤 도래할까? 이에 대한 견해는 매우 다양하다. 2025년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AI 기업의 리더들은 강인공지능이 약 2년에서 5년 이내에 도래할 것이라고 예측하며 최근에는 그 예상 기간을 더 단축하기도 했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이는 자신들의 연구 업적을 과장하고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려는 의도가 있을 수 있으므로 정확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한편, 일반적인 AI 연구자들은 절반 정도가 2047년까지 가능하다고 보고 있으며 일부는 향후 몇 년, 다른 일부는 수백 년 후까지도 예상한다. 결국 강인공지능 도래 시점은 아직 다소 불확실하다는 것이 결론이다.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언젠가는 강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결국 강인공지능의 시대가 온다면 교회가 이야기하고 있는 인간 지능의 우월성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인간은 결국 기계에 비해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에 대해 몇몇 학자들은 교회와 같은 맥락에서, 그럼에도 인간의 고유한 지능은 기계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힘을 지닌다고 이야기한다. 이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토마스 네이글(Thomas Nagel, 1937~)이다. 그는 <박쥐의 의식 논변>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잘 알려져 있듯, 박쥐는 초음파를 이용해 세상을 탐지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나 인간인 ‘나’는 박쥐처럼 세상을 지각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은 박쥐의 생물학적 구조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방식으로 세상을 느끼는 경험을 절대로 할 수 없다.
인간은 왜 기계로 설명될 수 없을까
이렇듯 어떤 생명체의 의식을 명확히 설명하려면 일인칭의 입장에서 그 체험이 어떠한지를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삼인칭인 외부의 입장은 이에 도달할 수 없다. 애초에 그러한 경험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이 설사 뇌의 신경 회로를 분석한다고 해도 인간의 의식을 이해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교회는 ‘인간의 이해’는 단순한 정보 처리나 기호 조작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의 지능은 지성과 의지, 영혼의 통합적 작용으로 본질화되기 때문이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은 <진리의 광채>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사물들이 왜 지금 있는 모습으로 있는가를 묻는 것은 인간 이성의 타고난 속성이다.”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를 관통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은 진리의 가장 깊은 통찰에서 비롯되고, 인간의 이성은 탐색과 논변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능력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고유한 작용으로 삼인칭의 입장에 머무는 기계는 결코 이를 따를 수 없다. 이에 따라 인간은 기능적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인공지능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위기에 처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
인간 지능의 아름다움
인간은 삶의 궁극적인 질문에 열려 있으며, 참되고 선한 것을 향해 나아가는 능력이 있다. 물론 모든 인간이 참되고 선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인간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 즉 양심이 있으며 인류는 도덕률과 자연법에 비추어 사회적 정의와 법률 제정을 통해 참되고 선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또한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지능은 존재의 총체성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단순한 측정 가능한 범위를 넘어 충만함 속에서 스스로 존재를 숙고하고 의미를 파악한다. 인간은 어떤 실용적인 목적보다 진리와 선,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해 이타적으로 열려 있는 존재이다.
이에 <옛것과 새것Antiqua et Nova>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인간은 질병과 화해의 포옹, 심지어 단순한 일몰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인간으로서 겪는 수많은 경험은 새로운 지평을 열고 새로운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데이터로만 작동하는 어떤 장치도 우리 삶에 존재하는 이러한 경험과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경험들을 따라올 수 없다.”
완벽함의 척도
결론적으로 인간의 지능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그 우월성을 본질적으로 지니므로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한편 기계의 지능은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피조물’이므로 인간이 유용하게 활용해야 할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해야 할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창의성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언제나 숙고해야 한다. <옛것과 새것Antiqua et Nova>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완벽함의 척도는 그가 습득한 정보나 지식의 양이 아닌 그가 행하는 사랑의 깊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 특유의 완벽함, 즉 사랑의 깊이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현대의 인간은 진리를 위해, 선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혹시 실용주의와 수학적 계산에 의지한 채 고귀한 자유를 기계에 내주지는 않는가? 나의 고통과 괴로움, 외로움 속에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고 있는가? 유용하다는 핑계로, 듣고 싶은 답을 준다는 이유로 하느님보다 기계에 되레 많은 것을 의탁하고 있지 않는가? 기계 앞에 서 있는 우리 신앙인들 역시 스스로 자문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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