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 준다. 그러나 부활 이전에 죽음이라는 고통이 있었고 그 죽음은 우리 죄를 대신한, 우리를 향한 희생과 사랑이었다. 이 숭고한 의미를 알면서도 언젠가 내가 주님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저 한없이 두렵고 피하고 싶어 하는 나의 나약함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기꺼이 받아들이신 죽음의 순종, 그 용기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래서 읽게 된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의 「죽음의 신비」는 나에게 매우 큰 의미의 방점을 남겼다. 이 책은 죽음이 더 이상 고통의 순간이 아니라, 신비의 과정임을 알게 해주었는데 그 깨달음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태초 하느님께서 세상을 좋은 모습으로 창조하시어 인간에게 내어 주시며 잘 관리하라고 맡겨주셨지만, 우리는 하느님께 등을 돌렸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손에서 시간을 박탈하고 인간에게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힘든 노동과 고통과 죽음을 짊어지게 하셨다.
이처럼 하느님의 현존이 우리의 마음에서 가려져 버린 순간, 그런 어두움을 틈타 죄는 또 다른 죄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인간은 죄에 사로잡혀 어둠 속에 살게 된다. 우리는 죄를 지은 자신을 감추기 위해 더 고립된 삶으로 빠져 버리고, 깨어있지 않기에 설령 하느님의 영이 나를 찾아오더라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나약함을 미리 다 아시고 처벌과 동시에, 우리를 구원할 길을 함께 마련해 주시기 위해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잘 견디어 낼 수 있도록 당신의 성자를 보내 주신 것은 하느님께서 내린 처벌을 인간이 스스로 잘 견디어 냄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기회를 얻게 해 주기 위한 일종의 장애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처벌을 순종의 정신으로 따르며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까지, 우리가 경험하는 힘든 노동과 고통 등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임을 깨닫고 그때마다 성실하게 상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의 판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판단에 순종하는 태도로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겸허히 걸어가야 한다.
우리의 하느님은 인간에게 땀을 흘리는 수고와 힘겨운 노동, 고통과 죽음이란 여정을 통해 당신께 다가오도록 섭리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삶의 불확실성과 한계를 통해 하느님과 마주해야 한다. 육체적인 죽음은 인생의 최종적인 ‘비워 냄’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느님을 직접 마주하는 것은 신앙의 결정체이자 순종하는 삶을 통해 얻어 누리게 되는 죽음의 최종적인 ‘결실’이다. 죽음에서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죽음을 통해 사랑과 희망의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 주실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이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 공허한 상태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품으로 들어 올려 지게 되는 것이다. 이 땅을 잃는 순간, 저 하늘을 얻는 축복이 열린다.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죽음은 두려움이거나 고통이 아니다.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있는 축복의 통행권이라 생각한다. 그 어느 날 부끄럽지 않는 마음으로 잘 받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하루를 정말 잘 살아낼 것이다. (가톨릭북클럽 서평단 김베로니카)
● 모임 발제 질문: 각자의 삶에서 ‘죽음의 신비’를 느껴본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