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탄생] 나자넷 예수는 어떻게 온 인류의 '그리스도'가 되었는가?

📚서평

[그리스도의 탄생] 나자넷 예수는 어떻게 온 인류의 '그리스도'가 되었는가?

Marco지호

2026. 04. 05
읽음 1

대한 민국은 3대 종교를 인정해주고 공휴일을 지정해한다. 필자는 천주교 신자이다. 하느님이라는 신을 믿는 사람으로서 신약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지만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의 삶이 궁금하였다. 일본의 가톨릭 작가는 척박한 문학적 토양 위에서 "그리스도의 탄생" 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문학의 언어로 풀어내었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마주했던 '하느님의 침묵'이라는 수수께끼가 어떻게 '영광스러운 재림'과 '메시아'라는 확신으로 변모해갔는지 그 신격화의 과정을 냉철하면서도 따뜻하게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대비를 목격한다.

우리는 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 (바로 오 vs 예수 제자들)

바오로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들은 세례명은 스테파노와 바오로이다. 스테파노는 비운의 죽음을 당한 순교자이고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다. 바오로도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지만 예수의 삶을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이제 제자들과 바오로와의 차이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제자들은 생전의 예수와 생활을 함께하며 그의 모습을 직접 보고 가르침을 들었다. 또한 그가 어떻게 활동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제자들은 생전의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들 나름대로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들은 예수와 함께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에 대한 기억이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바오로는 생전의 예수를 본 적도,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적도 없었다.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이전의 '예수'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존재이다. 반면에 바오로는 예수에 대해 그 죽음과 부활의 의미 이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이 보인다. 그에게는 '예수'보다는 '그리스도'가 중요했던 것이다. 바오로는 나자렛 사람 예수가 짧은 생애 동안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문제보다, 그가 왜 십자가에 달렸고, 부활했는가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졌다.

페이지 163쪽

예수와 함께 숨 쉬며 그의 생생한 기억을 간직했던 제자들, 그리고 예수를 본 적 없지만 그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평생을 건 바오로. 제자들에게 예수가 '잊을 수 없는 스승'이었다면, 바오로에게 예수는 율법의 사슬을 끊고 인간을 해방시킨 '그리스도' 그 자체였다. 하느님 교리 안에서는 우리들은 평등하고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린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무엇일까? 신앙생활하면서 이런 의문점들은 항상 가지게 된다. 우리는 하느님 안의 자유 의지가 있다고 한다. 하느님 안이 너를 선택했으니, 순명을 받고 실행하라고 가르침을 주는 분들도 있다.

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에 대한 뚜렷한 답은 없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써 하느님이 나를 보호해 준다는 신념을 가지게 된다. 신념 안에서 십계명을 따르고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격화되는 과정

 

예루살렘의 제자들이 처음부터 예수를 신격화하지는 않았다는 점은 분 면하다. 그 과정을 요약해 보자. 그들은 처음에 자신들에게 제기된 '하느님의 침묵'이라는 수수께끼와 마주하며 예수의 영광스러운 재림이라는 해답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예수를 구름에 타고 나타날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이 칭호가 서서히 메시아로 바뀌고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에서 나온다'라는 유대교 전승 때문에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리라.

결국 예수는 최초에는 하느님에게 선택된 뛰어난 예언자이자 랍비였으며, 평생에 걸친 노력과 수난, 참혹한 죽음의 대가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격을 받았다. 이것이 초기 제자들의 생각이었다. 이를 입증할 자료는 부족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라는 베드로의 말이 이를 드러낸다.

페이지 267쪽

신약 요한 성서 복음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구절이 있다. 구약에서 이어진 예언이 신약에서 이루어줬고, 하느님의 메시아로 예수님을 보내졌다고 한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어 우리와 동일한 고통을 받으셨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삶은 우리들에게 많은 귀감이 된다.

현대에서는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을 생각해 보자. 미국이 이란을 침공한 전쟁 속에서, 내가 섬기는 그리스도교나, 예수라는 메시아가 있을까?는 의문점들을 품게 된다. 종교적으로 회의를 느끼게 되면서, 무기력하게 된다. 흑자들은 기도하라고 하지만, 절망 속에 있을 때는 기도나 묵상도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피어난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탄생, 즉 종교의 탄생은 탄압을 받으면서 종교가 설립하게 되고 후대들에게 퍼지게 된다. 우리는 왜 이천 년 전의 한 남자를 여전히 믿어야 하는가? 현대의 비극과 전쟁 앞에서 신앙은 때로 무기력해 보이고, 하느님의 침묵은 절망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말했듯, 폭군의 지배는 죽음과 함께 끝나지만 순교자의 통치는 죽음과 함께 비로소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어떠한 교리적 강요나 순명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보호해 준다는 단단한 신념이며, 그 믿음 안에서 십계명을 나침반 삼아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태도이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발견했던 초기 공동체처럼, 오늘을 정직하게 살아내는 우리의 삶이 후대에게 남겨줄 가장 고귀한 선물이 될 것이다.

PS) 질문 : 그리스도가 메시아가 되어 후대의 많은 좋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신이 기독교 종교인으로서 후대인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선물(신념)들이 있으면 나누어 봅시다.

 

https://blog.naver.com/marco1983/224216914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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