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 청소년국 대학교사목부 시절 이야기입니다. 성실하게 활동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교내에서도 가톨릭학생회 회장을 했고, 제가 부임한 뒤에는 교구에서 중앙일꾼(소위 임원진)으로 활동하던 학생이었습니다. 쭉 이 친구의 열성을 지켜보면서 다듬어지면 주님을 위해 봉사할 좋은 재목이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그래서인지 예전부터 대학생 자매들에게도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는데 정작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군요. 대학교 4학년, 대학생이 대부분 그러하듯 이 친구도 수십 장의 이력서를 쓰면서 초조해하던 때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하는데 대화를 나누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부님, 요즘은 제가 지난 시간 서가대연(서울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 줄임말)에서 그토록 헌신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고 후회가 됩니다. 저도 남들처럼 스펙 더 쌓고 대외활동과 인턴십을 더 많이 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제 와서 얻은 것도 없고, 이게 뭔가 싶고 하느님을 원망하는 마음도 듭니다.”
저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따뜻하게 감싸 주지 않고, 날카롭게 한마디 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네가 여기서 신앙생활을 했다면 네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직은 젊기에 따뜻한 말로 대했으면 어땠을까 싶은데, 그때는 냉정하기 이를 데 없이 말했지요.
이후 친구는 대기업에 입사했고 1년 넘게 회사를 잘 다녔습니다. 그리고 다시 해가 지날 무렵 겨울에 저에게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녁 식사 다 끝나고 학생들과 헤어진 뒤 둘이 따로 만났는데, 그때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부님, 그날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신부님께서 ‘네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마음에 깊이 남았어요. 처음엔 너무 마음 아프고, 그렇다면 내 진심 같은 건 다 무시하시는 하느님이신가, 하는 마음도 컸죠.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신부님께서 저에게 던지신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어요. 그런데 제가 신부님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요. 실은 대학교 2학년 때 사제성소의 마음이 생겨서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다가 엄청나게 혼이 났어요. 더 고민하면서 전임 신부님께도 여쭤봤는데, 지도 신부님 두 분 모두 다 ‘넌 안 돼.’, ‘넌 사제성소는 아니야.’라면서 거절당했죠. 신부님께서 보시기에 어떤가요?”
“네가 왜? 그 마음의 소리가 아직도 들리니?”
“예.”
“사회생활 1년 넘도록 한 지금까지 그 소리가 들리면 무시하지 말고 그 소리를 따라가렴. 난 네가 사제가 되었으면 한다.”
저는 주님께서 부르심을 확신했습니다.
“신부님, 사실 교구 예비신학교를 나가고 있었어요. 이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전에 신부님 두 분께서 강하게 ‘넌 아니야.’라고 말씀하셔서 정말 아닌 줄 알고 꿈을 접었었거든요.”
이 친구는 하나씩 하나씩 사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일이 더 있었지만 조금 시간을 뛰어넘어 봄에 만나서 나눈 이야기부터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때는 봄이 한창인 5월이었습니다. 어버이날이 지난 뒤에 만났는데 이 친구가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신부님, 이번에 본가로 내려가 부모님을 뵈었고, 지금 본당이 분가되어 신설되는 본당으로 교적을 옮겼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주일 미사를 갔는데 신기하게도 저희 어머니께서 열심히 구역회 봉사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원래 안 그러셨는데요. 그리고 성경도 열심히 읽으시고 필사도 하세요. 매일 미사도 나가신대요. 어머니랑 같이 주일 미사를 드리고 나오면서 본당신부님께 인사를 드렸는데 신부님께서 저를 보자마자 ‘사제가 될 생각 없니?’ 하고 물으시는 거예요. 저와 본당신부님은 초면이었는데요. ‘미사 때 얼굴에서 후광이 계속 비쳤다.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라고 하셨어요. 저희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면서 ‘신부님,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얘 지금 여자 친구도 있고 사제직에 마음도 없어요.’라며 황급히 저를 데리고 나가셨죠.
집으로 가면서 저는 어머니께 ‘어머니, 실은 이번 어버이날에 저 신학교 가게 해 달라고 말씀드리러 왔어요.’ 했더니 어머니께서 매우 놀라시더라고요. 또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지만 아버지께도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께서는 별말씀 없이 ‘네가 지금까지도 그 마음이 있다면 내가 너를 어떻게 말리겠니? 그렇게 하렴.’ 하시면서 담담히 허락하셨습니다.”
저 역시도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후 이 친구의 행보가 놀라웠습니다. 부모님의 허락을 받자, 이 친구는 여자 친구와 헤어졌습니다. 저는 이 친구들을 다 사목했기에 알고 있었습니다. 여자 친구가 보인 눈물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남자 친구를 원망하던 친구에게 사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저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얘야, 이 친구가 사제 서품 받으면 그때는 꼭 용서하렴.”
그해 가을 무렵, 신학교를 가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던 여자친구도 주님 때문에 내려놓고, 남들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대기업이란 타이틀과 높은 연봉도 버리고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2023년 대전교구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고 사제로서 예수님의 사랑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나가 묻고, 주님부터 찾으며 주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때 우리는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고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깨어 있고 주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참된 진리 안에서 성령 충만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영혼입니다. 그런 사람이 신앙을 인도할 수 있게 됩니다. 어느 순간 시스템을 중요하게 여기는 가톨릭은 성령께서는 바람이 불고 싶은 데로 불듯, 하느님께서는 모든 영혼들 속에서 인간의 지식과 지혜, 제도와 시스템을 뛰어넘어 일하시는데 이를 잊어버리고 하느님의 시선을 잃어버립니다. 어느 순간 매일 미사 속에서 말씀의 전례를 통해 매일 당신의 메시지를 전하시고 이를 매일의 삶 속에서 실천할 때 주님 사랑의 영, 평화의 영, 겸손의 영, 기쁨의 영, 분별의 영 등등 성령의 성품들이 우리 영혼을 차지하면서 특별한 피정에서가 아니라 일상이 피정이 되는 여정을 살 수 있도록 복음서에서의 제자들과의 공생활을 통해 이미 다 드러내셨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공동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교구나 공동체가 하는 성서모임, 피정, 꾸르실료, 선택, ME, 레지오 등을 통해서만 신앙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이 신자들 사이에 깔려서 일상에서 ‘나-하느님’으로 직접 연결되는 일상에서의 기도 생활과 성사 생활에서 은총받는 법을 잃어버립니다. 이 친구의 여정은 긴 시간 매일의 삶에서 주님께 묻고 성경 말씀 속에서, 미사 안에서 고민의 여정 속에서 자신의 삶 속에서 나의 영혼에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사제직의 부르심에 응답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일상에서 깨어 있는 성령 충만한 살아 있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