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 거룩한 책. 성경을 읽다 보면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거대한 사랑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오늘의 나에게 닿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편하게 한글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배울 수 있는 것은 히브리어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을 담는 그릇, ‘한글’의 의미와 그 가치를 생각하며 성경 번역에 참여했던 정태현 신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신부님, 반갑습니다. 성경 번역 작업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는지, 처음 시작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1988년 여름의 일입니다. 주교회의 사무처(당시 CCK)에서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당시 강우일 주교님), 사무총장(당시 정은규 신부님), 정양모 신부님과 제가 모여 구약 성경 번역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저는 당시 벨기에 유학을 마치고 전북 용안 본당 주임 신부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때 신약 성경은 이미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200주년 기념 번역 신약 성경’이 있어서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고, 구약만 새로 번역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신구약 번역이 나눠서 진행된 것이었군요.
구약의 히브리어 성경 낱권들은 제주교구 임승필 신부님이, 그리스어 성경 낱권들(제2경전)은 제가 맡기로 했어요. 그리고 1989년 9월부터 제가 먼저 서울로 올라와서 번역 작업을 시작했고 다음 해에 임 신부님이 올라오셨지요. 그러다 히브리어 성경의 분량이 많아서, 저도 제2경전 외에 히브리어 성경 낱권들을 나눠서 번역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신약 성경 전공이고 구약과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에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1991년부터 1993년까지 2년 동안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히브리어, 아람어, 구약 성경 등을 공부하면서 유학 생활을 더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1993년 여름에 귀국하여 번역 작업을 다시 계속했습니다.
번역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처음 번역을 시작할 때는 CCK에 아무런 기반 시설이나 체계가 없었어요. 작업 공간도 마련해 주지 않아서 저는 청담동에 있던 생활성서 사옥 반지하방에서 기거하며 번역 작업을 했고 임 신부님은 명동 샬트르 바오로 수녀원 본원에서 작업을 했습니다. 수녀원에 미사를 해 주는 조건으로 숙식을 제공받았고, 그러다가 1991년부터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수지 성모 교육원에서 숙소와 연구 공간을 마련해 주어서 그곳에서 작업을 이어 갔습니다. 그 뒤 1995년경에 임 신부님이 먼저 CCK 새 건물로 입주하고 1년 뒤에 저도 합류했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앞선 번역자들의 경험이나 노하우를 전혀 전수받지 못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는 것이지요.
특히 번역이 쉽지 않았던 구절이나 단어가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중요한 단어를 우리말로 고정하는 작업, ‘concordance(용어 색인)’를 새로 정확하게 만드는 작업이 쉽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 ‘hesed(헤세드)’는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께 500번 이상 적용되는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를 우리말로 정확하게 옮기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속성을 풀이하면, 한결같은 사랑, 완전한 사랑, 끝없는 사랑, 변함없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 상대의 행복만을 원하는 사랑, 자기희생적인 사랑, 진실한 사랑, 연민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이를 우리말로 정확하게 옮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원어 그대로 ‘헤세드’라고 할 수도 없고요. 그래서 ‘자애’라는 말로 고정하기로 했어요. 구약 성경에서 ‘자애’라는 말이 나오면 하느님의 이런 완전하고 진실한 사랑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번역하면서 ‘본문에 충실한 번역’과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 사이에서 어떤 고민이 있으셨나요?
‘원문에 충실한 번역’과 ‘유려한 한국어 번역’은 두 마리 토끼입니다. 공동 번역은 후자에 치중하는 바람에 전자에서 많이 멀어졌지요. 임 신부님은 전자를 중요시했고 저는 후자를 중요시했습니다. 둘이 얼마나 많은 토론과 갈등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돌이켜 보면 두 사람이 번역 책임자로 선정된 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던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번역 작업을 함께하면서 많은 것을 서로에게서 배웠습니다.
우리는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위해서 불가타(대중라틴말 성경)와 셉투아진타(그리스어 성경)는 물론이고 현대어 성경, 곧 영어 성경 6개, 불어 성경 2개(프랑스 공동 번역 성경 Tob과 Osti 성경), 독일어 성경과 이탈리아어 성경, 심지어 네덜란드어 성경까지 참조하고 많은 주석서를 참조했습니다. 때로는 히브리어 본문 자체가 번역 불가능할 정도로 미완성 상태인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땐 번역을 아예 포기하고 말없음표(...)로 남겨 두기도 했습니다.
여러 번역본과 주석서를 참고하시면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신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당시 임 신부님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작업을 해서 번역해 놓으면, 그때부터 우리는 두들겨 맞기 시작할 거다.” 이 말에 저도 동의했습니다. 비판의 주된 방향은 두 가지죠. 하나는 히브리 원문을 정확하게 옮기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말이 떫고 껄끄럽다는 것이지요. 우리로서는 히브리 원문에도 충실하면서 한국말로 통하는 번역을 시도했지만, 이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도망가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이전까지의 우리말 번역을 보면, 우선 개신교 성경들은 대부분 현재 한국인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아닌 데다 우리말 문법과 맞춤법에 어긋나는 것이 많고, 확인한 바는 없지만 히브리어 원문이나 그리스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 같지 않아요. 또 1971년에 나온 개신교와 천주교가 함께 내놓은 공동 번역은 현대 우리말로 손색이 없지만 원문에서 멀어진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로서는 우리말이 좀 껄끄럽더라도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기본적으로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나 해서, 우리말이 미흡하더라도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함께 작업한 분들과는 어떻게 의견을 조율하셨나요?
임 신부님과 제가 번역 전담이었으므로 임 신부님 번역은 제가, 제 번역은 임 신부님이 가장 먼저 교차로 체크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성서학자 신부님(정학근, 범선배, 정영한, 이기락 신부님이 주요 구성원)들이 윤문을 하며 원문에 충실한지 확인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외화 번역 작가 민병숙 선생님, 국어학자 정양완 교수님과 이승화 선생님, 시인 이해인 수녀님 등이 우리말 윤문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여기서는 순수하게 우리말의 정확성과 유려함을 따졌습니다.
윤문 과정에 이해인 수녀님도 참여하셨다는 점이 신기합니다.
이분들이 성경 원문을 모르기 때문에 일반 독자의 관점에서 번역의 가독성을 높이는 데 의견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자유롭게 제안하도록 요청했지만, 제안이 아무리 좋더라도 원문에 반하거나 본문에서 너무 멀어지면 채택할 수 없었습니다. 윤문 작업은 보통 10~20일 정도 걸렸고, 전국에 흩어진 이곳저곳 피정의 집을 전전하며 이루어졌습니다. 윤문 작업에 참여했던 모든 분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번역 작업에서 가장 수고한 분은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였던 신애경 자매님, 그리고 CCK 편집부장으로 재직했던 강대인, 배봉한 선생님입니다. 제가 이 일에 참여했던 1989년부터 1999년까지 함께했던 분들이고, 그 이후에 신약 성경 번역에는 제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번역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원칙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우선 어느 정도의 교육 수준에 맞추어 성경을 번역할 것인지를 정했습니다. 그래서 내용과 상관없이 성경의 말마디와 표현은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정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순수한 우리말을 우선시했고, 일본식 우리말은 배제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구하고’는 ‘-에도 아랑곳없이, -을 무릅쓰고, -에도’) 등으로 바꾸었고 ‘-에 있어서’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비속어는 사용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또한 ‘신경을 쓰다’는 사용하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다’ 정도로 바꾸었습니다. 영어를 비롯한 다른 외국어 사용도 배제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고유 명사는 되도록 원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하려고 했고 이미 관용어로 굳어진 경우는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발음 표기 원칙은 따로 정해서 별책으로 CCK에서 출판했는데, 한글 맞춤법과 외국어 표기 원칙을 따랐습니다. 성경의 세계가 고대인 점을 감안하여 그 시대에 사용했을 법한 용어나 표현을 채택했습니다. 예를 들어 ‘총사령관’ 대신 ‘장수’나 ‘수장,’ ‘비서실장이나 장관’ 대신 ‘궁내 대신’이나 ‘고관’, ‘시’나 ‘읍’ 대신 ‘도성, 성읍, 고을, 마을’ 등을 사용했고 ‘왕’ 대신 ‘임금’을 선호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성경의 고풍스러운 성격을 살려 번역하다 보면 자칫 성경의 말마디나 표현들이 현대인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이해 불통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리’ 대신 사용한 ‘달거리’나 ‘생리대’ 대신 사용한 ‘개짐’을 젊은이들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신부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성경 번역’의 기준은 무엇이고, 현재 번역된 성경은 그 목표에 얼마나 가깝다고 보시나요?
‘좋은 성경 번역’의 기준은 당연히 원문에도 충실하고 우리말도 매끄러운 번역입니다. 그러나 이 둘을 다 만족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성경 번역은 일반 서적이나 문학 서적의 번역과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일반 서적이나 문학 서적은 뜻이나 뉘앙스를 정확하게 옮기는 것을 가장 중요시합니다. 특히 시의 경우는 거의 재창작이라 할 만큼 말마디를 기계적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외국말에 내포된 의미와 뉘앙스를 정확하게 우리말로 옮겨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 번역은 다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구나 절은 그 이후 계속해서 반복되고 때로는 그 반복이 구약을 넘어서 신약 성경, 묵시록에까지 이어집니다. 따라서 문맥에 따라 반복되는 구와 절과 표현은 앞에서 이야기한 하느님의 속성처럼 문맥과 상관없이 고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원문에 충실한 정확한 번역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또한 전례 및 성가에서도 성경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운율도 있어야 하고 편하게 입에 오를 수 있을 만큼 우리말이 유려해야 합니다.
두 조건을 다 만족시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네요. 해외 성경 번역 사례와 비교했을 때, 우리 교회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을까요?
영어 성경의 경우, 원문에 비교적 충실한 번역에서부터 가독성이 높은 대중적 번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번역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번역도 계속해서 수정판을 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RSV(Revised Standard Version)와 NRSV(New Revised Standard Version), AB(American Version)와 NAB(New American Version), JB(Jerusalen Bible)와 NJB(New Jerusalem Bible) 등이 있지요. 미국 주교회의에서는 NAB를 공식 가톨릭 성경으로 채택하고 전례에도 사용합니다. NRSV는 원문에 더 충실한 번역이고 NJB는 더 대중적 번역입니다. NAB는 그 중간 정도 될 것입니다.
이제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 처음으로 원문에 충실한 번역본이 하나 나왔으니, 수정본이나 다른 번역본이 계속 나오면 좋겠습니다. 대략 30년 주기로 수정본이나 새 번역이 나오는 게 바람직합니다. 언어가 끊임없이 발전할 뿐 아니라 첫 번역 시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류들도 계속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탈출기에 나오는 ‘떨기나무’는 ‘가시덤불’로 옮기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팔레스티나의 식물 이름을 결정하는 데 참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없는 식물이 많거든요. 국내 식물학자들의 자문을 받았습니다만 그분들도 틀릴 수 있겠지요. 떨기나무로 옮긴 식물은 본디 가시가 많은 덤불입니다. 그리고 가시는 교부들의 저서에서 예수님의 가시관과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떨기나무 대신 가시덤불로 옮기는 게 옳다고 우리 연구소의 주원준 박사가 주장했습니다. 요나서에 나오는 아주까리는 본디 ‘끼까욘’이라는 열대성 식물입니다. 이 경우는 원문 그대로의 이름으로 두는 것도 괜찮겠다 싶습니다.
현재 우리말 성경의 경우, 구약은 저와 임 신부님이 주로 번역했고 신약은 임승필 신부님 혼자 하셨습니다. 저는 구약 성경을 마치고 애초 계획대로 교구로 돌아왔지요(본디 신약은 분도출판사에서 완성한 200주년 기념 신약 성서를 채택하기로 했었습니다. 저는 1998년에 제가 설립한 한님성서연구소를 키워 나가는 데 주력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끊임없이 수정되고 또 새로운 버전이 나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상설 번역 기구가 주교회의 차원에서 설치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한국어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한국 가톨릭 교회에 성서 공부가 촉발된 것은 1971년 공동 번역이 나오면서부터지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는 공인본으로 불가타(대중라틴말 성경)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국어 번역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될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이 제국의 언어 라틴말을 사용했지만, 그 이후 라틴말을 알고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점차 줄어들어 금세기에 들어와서는 극소수 엘리트 계층으로 제한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반 신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접할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 헌장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서를 가까이할 수 있는 길은 넓게 열려 있어야 한다.”(22항)라고 선언하면서 각국 교회가 모국어로 성서 원문에 충실한 번역본 성경을 갖기를 적극 권장하였습니다. 그 이전까지 신자들은 하느님 말씀인 성경에서 유배당했고, 하느님의 말씀이 신자들에게서 유배당해 왔습니다. 종교 개혁 때에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오면서 독일말로 성경을 번역하고 성경의 중요성만을 강조한(Sola Scriptura) 결과, 가톨릭 교회는 잘못된 성경 해석과 성경 번역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심지어 ‘성경 번역을 시도하는 자는 이단의 앞잡이’라는 일부 잘못된 인식도 있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의 결과가 지금 우리 신앙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이네요.
제가 어릴 때는 한국 천주교회가 신약 성경만 가지고 있었어요. 사사성경(사복음서)과 종도행전(사도행전), 서간성경(서간)만 있었고 여기에 묵시록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 저는 이 신약 성경을 어디에서 옮긴 것인지 모릅니다. 원문에서 옮겼을 리는 없는데, 영어에서 옮겼는지 불가타에서 옮겼는지, 또 누가 옮겼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구약 성경은 아예 없었지요. 저는 구약사기(舊約史記) 상권과 하권을 통해 구약 성경을 접했습니다. 구약사기는 구약을 이야기로 엮은 책입니다. 흑백이지만 그림까지 곁들여져 초등학교 시절에 여러 번 즐겨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 오래전에 작고하신 선종완 신부님이 구약 성경을 한 권 한 권 옮기기 시작했지요. 선 신부님은 나중에 공동 번역 작업에 동참하셨습니다. 공동 번역이 나왔을 때 선 신부님은 ‘하느님께서 비로소 우리말로 말씀하시게 되었다.’라고 하시면서 매우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전에 누려 보지도 못하고 상상도 못한 말씀의 황금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성경 통독과 성경 필사, 다양한 성경 공부 프로그램, 그리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는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와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주해》(성바오로딸 출판사와 한님성서연구소 공동 기획)를 비롯한 각종 성경 주석서 편찬 등이 떠오릅니다. 이 모든 성경 사도직의 기초가 바로 성경의 자국어 번역입니다.
오늘날 한국 신자들의 성경 읽기 방식은 과거와 어떻게 달라졌다고 느끼시나요?
공동 번역이 나오기 전까지 한국 천주교의 일반 신자들은 성경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성경에 대해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은 일선 사목자들의 강론을 통해서였지요. 하느님 말씀이 간접적으로 그들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엔 신자들이 직접 성경 말씀을 읽을 수 있고 수많은 주석서와 해설서를 통해서 성경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또한 유튜브를 통해 성경에 관한 엄청난 양의 정보를 얻습니다. 성경은 이제 더 이상 성직자나 수도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긍정적 현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관한 수많은 정보 가운데는 비판적, 부정적 견해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자들은 정통 교리에 어긋나는 갖가지 지식에 쉽게 노출되어 신천지나 JMS, 통일교와 같은 신흥 종교나 사이비 종교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례 준비를 하면서 배운 교리가 아직 확고하게 자리를 잡기도 전에 이런 잘못된 성경 지식을 흡수하면 큰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새 교리서가 우리말로 처음 번역된 것은 1997년입니다. 이전 교리서와 크게 다른 점은 새 교리서가 모든 교리를 성경과 성전에서 끌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글로 기록된 말씀이고 성전은 교회의 삶 안에 들어와 있는 말씀입니다. 둘 다 하느님 말씀입니다. 성경에 관한 지식은 많은데 그 지식이 교회의 가르침과 단절되거나 충돌할 때 신앙의 중심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요즘 한국 신자들의 풍요로운 성경 독서와 공부에서 우려되는 점입니다.
새 성경 번역 작업을 통해 신부님의 신앙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소화 데레사 성녀는 ‘내가 그리스어를 배워서 신약 성경을 원어로 읽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배워서 하느님 말씀을 원어로 읽고 번역할 수 있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어원적 의미를 알면 하느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로 ‘다바르dabar’라는 말이 있는데 이 낱말은 말씀과 사건을 동시에 뜻합니다. 우리말로는 말씀과 사건은 완전히 다른 말인데 히브리어로는 한 단어입니다. 문맥에 따라 ‘다바르’는 말씀으로 번역해야 할 때도 있고 사건으로 번역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사실이 매우 이상하고 혼란스러웠는데, 구원 역사 전체를 바라보면서 완전하게 이해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말씀으로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일어난 사건은 후대에 구전 전승이나 기록으로 남아 말씀이 됩니다. 그런 다음 이 말씀은 다시 사람들 가운데서 사건을 일으킵니다. 말씀이 사건이 되고 사건이 말씀이 되었다가 그것을 읽고 듣는 사람들 가운데서 말씀이 다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또 히브리어 ‘야다yada’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남녀가 잠자리를 같이하다, 몸으로 체험하다.’라는 뜻이고 이 뜻은 그리스어 ‘기노스코ginosko’에 그대로 이어집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에서 이 단어가 쓰이는데,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적인 정보를 많이 갖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온 삶으로 그분들을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분만 느낄 수 있는 깊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말과 글로 전하면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신학생 시절부터 사제는 한 손에 신학을, 다른 손에는 문학을 쥐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지요. 신학은 하느님을 이해하기 위해, 문학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신학인 동시에 문학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동시에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직신학 또는 교의신학과 같은 전통적 신학에서는 철학적 개념으로 하느님을 이야기하지만, 성경은 역사 안에서 표상과 설화와 상징과 은유로 하느님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훨씬 더 쉽고 더 친밀하게 생생한 현존으로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도 성경에서는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엮어 나가는 구체적 이야기로 설명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느님의 본질에 대해 말할 때도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나 신학자들은 철학적 개념,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곧 다른 모든 것들을 움직이게 하면서도 본인은 움직이지 않는 존재로 제시하지만, 성경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16)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번역하고 말과 글로 전함으로써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된 것 자체가 저에게는 큰 은총이요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