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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특집 ‘새로고침’
202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월간 특집 '새로고침'은 익숙해진 신앙의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고, 마음의 방향을 다시 세우는 작은 멈춤의 시간이에요. ⏸️
오늘의 글은 바오로 사도의 선택과 고백을 통해 '회심'의 의미를 우리 삶 가까이에서 다시 바라봅니다. 지금, 2026년을 맞이한 우리의 일상에서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부분을 함께 찾아볼까요?💖 |
신약 성경 27권 가운데 바오로 사도의 이름으로 기록된 것만 13권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신약 성경 중 절반 가까이 되는 이 편지들을 바오로 서간, 보다 정확히는 바오로계 문헌이라 부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바오로 사도의 위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더 나아가 가톨릭 교회 전례는 매년 1월 25일을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로 지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계기로 이방인의 사도라고 불리게 되었을까요? 그의 신앙 여정에서 회심 사건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 줄까요?
바오로? 사울?
사실 바오로(개신교와 성공회에서는 바울)와 사울은 서로 다른 이름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차이가 반영된 동일한 이름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라틴어 발음에서, 사울은 히브리-셈어 발음에서 유래합니다. 그가 회심 전에는 사울로 불리다가 회심 후 바오로로 개명했다는 통념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바오로는 여러 문화권에 동시에 속해 있던 인물이었으며, 흔히 말하는 ‘금수저’였습니다. 바오로의 사회문화적 유산을 짚어 보면서 그의 회심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자 합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 출신
바오로는 킬리키아 지역(오늘날의 튀르키예) 타르수스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사도 9,11.30; 11,25; 21,39; 22,3). 당시 이 지역에는 그리스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셀레우코스 왕조에 이르기까지 헬레니즘 문화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곳입니다. 이후 킬리키아는 기원전 67년 로마 제국의 속주로 편입됩니다.
그의 편지를 근거로 볼 때, 타르수스의 바오로는 신약 성경이 기록된 언어인 코이네 그리스어를 능통하게 구사했으며 헬레니즘 수사학(상대방을 설득하는 웅변술)에도 일가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바오로는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구원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온 세상 이방 민족에게 전하기 위해 이미 준비된 인물이었습니다.
로마 제국 시민권자가 ‘금수저’인 이유?
바오로가 ‘금수저’였던 두 번째 이유는 로마 제국의 시민권자였다는 사실입니다(사도 16,37; 22,25-29; 23,27). 신약 성경 시대에 혹자는 돈을 주고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바오로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제국의 시민권자였다고 전해집니다(사도 22,28).
당시 제국 시민권자에게는 여러 법적인 권리가 주어졌는데, 공식적인 재판을 거쳐 판결을 받을 권리가 포함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오로가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올리는 장면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제국 법률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바오로에게 로마 시민권자라는 사회적 지위는, 제국의 중심지인 로마에서 모든 민족을 향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사도 28,17-31).
가말리엘의 제자, 청년 바리사이
고대 유다교 전통에서 율법 학자, 곧 바리사이는 유다인들의 신앙 여정에서 길잡이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서 구약 성경이라고 부르는 오경과 역사서, 예언서와 시서 등을 해석하고 풀이하는 정통한 스승이자 종교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오로는 율법 학자 가말리엘 밑에서 구약 성경에 관한 가르침을 받습니다(사도 5,34.39; 22,3).
히브리 사람이며 순수 혈통의 이스라엘 사람, 벤야민 지파 사람이자 아브라함의 후손(로마 11,1; 2코린 11,22; 필리 3,5)이었던 바오로는 율법에 충실한 청년 바리사이였습니다. 그는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갈라 1,14)라고 자신의 과거를 숨김없이 밝힙니다.
그러나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던 ‘금수저’ 청년 바리사이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통해 배타적인 구원을 이루신다고 확신했습니다. 율법을 통한 길 외에는 모두 그릇되고 잘못된 길이었기에,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나자렛 예수라는 인물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세우신 신생 교회를 박해하기에 이릅니다(사도 8,3; 9,1-2; 1코린 15,9; 갈라 1,13).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그 누구에게도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금수저 중의 금수저’ 바오로는 자신이 누린 모든 인간적 조건과 태생적 특혜를 상대화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필리 3,7) 율법을 위해 교회를 박해했던 그가 어떻게, 그리고 왜 스스로 ‘흙수저’가 되었을까요?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2코린 11,23-26)
반짝반짝 빛나던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며 ‘흙수저’로서 이중고를 겪습니다. 유다인들로부터는 동족의 배신자라고 낙인이 찍혔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던 이방인들로부터 받는 멸시와 천대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오로는 이 모든 박해와 역경, 모욕과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살아 낼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성경은 그 자체로 객관적이며 순수한 의미의 역사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한 시대를 살아가던 신앙 공동체의 신앙 고백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역사 속에서 일궈 내신 구원의 드라마가 각 시대의 문학 양식과 감수성이라는 필터링을 거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오로의 회심 과정의 경우 사도행전 9장, 22장 4-31절, 26장 9-18절에서 세 차례 보도됩니다. 하지만 이 서술을 있는 그대로, 다시 말해 날것 그대로의 역사적 기록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일정 부분 어려움이 있습니다.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을 집필한 저자는 바오로보다 후대의 인물인 데다, 오늘날의 SNS나 ‘브이로그’에서처럼 바오로의 회심 과정을 실시간으로 촬영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바오로의 회심 사건에는 배제할 수 없는 신앙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10)
바오로의 회심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짚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이를 단순한 심리적 방어 기제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바오로는 편지들에서 유다교 시절 이력을 부인하지 않고, 구약 성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수신자 교회 공동체를 설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트라우마의 결과가 아닙니다.
둘째, 바오로의 회심을 ‘개종’이라고 성급하게 일반화할 수 없습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은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드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자신이 믿어 왔던 이스라엘의 하느님, 유다인들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안에서 더 깊이 있게 체험한 것입니다.
셋째, 바오로의 회심을 한순간에 일어난 드라마틱한 사건으로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가 누렸던 ‘금수저’의 지위와 역할은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에서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하며 일종의 준비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흙수저’처럼 이방인의 사도로 살았던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 섭리라는 큰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작지만 소중한 퍼즐 조각입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회심이란?
고달프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회심이라는 주제는 거창하고 버거운 주제로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청년 실업과 직장 내 어려움, 낮아지는 자존감, 자신만 빼고 모두 행복해 보이는 현실, 물가 상승과 주거 문제 등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도 나날이 무거워지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2026년, 하느님 안에서 또 한 번 걸음을 내딛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각을 ‘새로고침’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금수저’에서 ‘흙수저’가 된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통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마리를 찾아봅시다.
첫째, 신앙인에게 회심은 과거의 흑역사를 잊어버리거나 삭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살아갑니다. 때로 십자가를 덮어 두거나 인정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가린다고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현실 부정이나 도피일 뿐입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회심이란 아픈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의 십자가를 봉헌하는 것, 그리고 나의 십자가를 주님의 십자가와 일치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둘째, 신앙인에게 회심은 하루아침의 즉각적인 변화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이비 종교나 유사 종교에서 종용하는 즉각적인 변화와 주변 사람들과의 극단적 관계 단절은 우리의 일상을 파멸로 이끕니다. 지금 당장 낮아진 자존감이 한순간에 높아지는 것 같고, 거짓 선교를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고 부릅니다. 늪지대에 빠져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회심이란 나의 일상을 곰곰이 바라보고 삶 한가운데서 침묵 중에 말을 건네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셋째, 신앙인에게 회심은 일상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내면화·구체화하며 살아가는 점진적이고 꾸준한 준비 과정입니다. 타르수스 출신이며 로마 제국 시민권자였고 청년 바리사이였던 바오로의 ‘금수저’다운 조건들은, 그리스도를 만난 뒤 그가 기꺼이 ‘흙수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지금 당장 직면해야 하는 삶의 고난도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 얼마든지 상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인 생명에 감사드리며, 우리의 일상을 주님과 함께 어떻게 채워 나갈지 고민해야 할 시간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어떤 계획을 품고 계시는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어야 할 순간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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