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피정을 함께할 한민택 신부입니다.
먼저 시작 기도로 마태 11,28 말씀을 듣겠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피정 갑시다, 신자 여러분~ 하나뿐인 신자 여러분~ 상처투성이 병이 들어 버린 당신, 피정 가서 낫게 하리다!”
한 유행가 가사를 패러디하여 불러보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무거운 짐으로, 수많은 걱정과 근심거리로, 마음 깊이 패인 상처로 힘겨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우리 영혼을 돌보고 치유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피정’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이 단어를 처음 듣는 분도, 본당이나 단체, 혹은 교구에서 실시하는 성지 순례나 피정 프로그램에 참여한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피정을 ‘라이프스타일’로 생각하는 분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피정은 천주교 신자의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말이죠. 매년 일정 기간 동안 피정을 하는 것이 교회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사제나 수도자뿐 아니라, 피정은 모든 신자들에게 열려 있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교회의 오랜 전통입니다. 특히 오늘과 같이 상처로 점철된 우리 삶에는 더없이 필요한 유산입니다.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나오는 ‘피정’에 대한 설명을 읽어 봅시다.
“가톨릭 신자들이 자신들의 영신생활에 필요한 결정이나 새로운 쇄신을 위해, 어느 기간 동안 일상적인 생활의 모든 업무에서 벗어나 묵상과 자기 성찰기도 등 종교적 수련을 할 수 있는 고요한 곳으로 물러남을 말한다. …… 피정은 원래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기도했던 일(마태 4,1-2)을 예수의 제자들이 본뜨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교 안에서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한국가톨릭대사전 12권, “피정”)
피정은 한 마디로 ‘고요한 곳으로 물러남’을 말합니다. 여러 종류의 피정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영혼과 마음을 돌보는 시간으로 삼고자 합니다. 내 안의 성소(聖所), 곧 거룩한 장소로 들어가는 시간, 하느님과 오붓한 만남을 갖는 시간입니다. 그동안 세상일에 혹은 봉사에 지쳐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못했다면 이제 나의 육신, 영혼과 마음을 돌보고자 합니다. 나만의 시간,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시간, 주님과 나만의 오붓한 시간을 마련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일 털어버리고 그분과 함께 좀 쉬고자 합니다.
피정, 내 삶의 버팀목
주님께서 파견 다녀온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그만큼 피정은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쉼의 시간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죽을힘을 다 해도 모자라는데 쉬는 것이 웬 말인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쉬었다 가는 것의 중요성을 경험한 사람은 이러한 반응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잘 압니다. 우리가 더 건강히 더 멀리 가기 위해서는 쉼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파리에서 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4년을 신학생으로, 7년을 사제로 파리에서 살았습니다. 경험한 분은 아시겠지만, 외국 생활이 그리 탐탁지만은 않았습니다. 언어 공부는 물론,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고 사람들도 사귀고 다른 나라 언어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논문까지 써야 했습니다. 그 과정이 제겐 너무 어렵고 힘에 부치는 일로 다가왔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남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 많은 시간을 들여서 공부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영성 생활에 많은 힘을 쏟지 못하게 되었고, 영적인 메마름은 하루하루 더해만 갔습니다.
그런 제게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것이 바로 피정이었습니다. 피정은 메마른 삶의 오아시스와도 같았습니다. 공식 피정과는 별도로,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방학을 이용하여 개인 피정 일정을 잡았습니다. 피정 날짜가 다가오면 제 가슴은 설레고 뛰었습니다. 성삼일 혹은 성탄을 맞아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공부나 세상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영적 휴식과 영적인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일상을 떠나 새롭고 거룩한 환경에서 나만을 위한 시간을 마련해 그 시간을 정성스럽게 사용하는 것 자체가 제게는 커다란 위로요 위안이었습니다. 전례와 개인 묵상 그리고 수도원 주변 산책 가운데 저는, 누군가가 저를 감싸안고 지탱해 주며 함께 호흡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나를 부르시고 나와 함께 걷고 계신 하느님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분과 함께 호흡하고 대화하는 가운데 위로와 치유를 받습니다. 새로운 열정과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이처럼 피정은 제게 영적인 힘을 끊임없이 불어넣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열정적으로 살아갈 힘을 주었던 동반자였습니다.
침묵, 내면을 비우는 시간
피정에서 중요한 것은 침묵입니다. 침묵은 단순히 말을 안 하는 것을 넘어 내면을 비우는 일입니다. 얼마나 많은 세상 것들로 나의 내면을 채워 왔는지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밑에 흐르는 고요한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일상을 떠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상이란 나를 길들여 온, 익숙하고 안락한 환경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타성에 젖게 하는 환경이자 떠나지 못하도록, 안주하도록, 그냥 머물러 있도록 하는 환경이기도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떠나는 것만이 떠남의 필요성을 일깨웁니다. 이는 수동적으로 떠밀려 살지 않고, 내 삶을 다시 건설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일상을 떠나서도 진정으로 일상을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지순례나 피정 중에도 머리와 마음은 온통 일이나 일상의 근심거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떠난다는 것은 나에게 맡겨진 일들, 책임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정리가 필요합니다.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얄궂은 말이겠지만, 사실 세상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갑니다. 내가 사라지면 몇몇 사람은 잠시 슬퍼하거나 불편해 하겠지만, 이내 일상은 이어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과감히 떠날 준비를 해도 좋습니다. 마치 긴 여행을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피정은 일반적인 여행과는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피정은 영적인 휴식의 시간이며 영적 힘을 회복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피정은 순례와도 다릅니다. 순례가 자기 자신을 깎는 여정이자 먼저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흔적을 따라 걷는 것이라면, 피정은 그것과는 달리, 조금 더 가볍고 밝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진지하지 않게, 너무 무겁지 않게, 그러나 본질에 더 가깝게” 하는 것이 피정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것이 본질에 가까운 것일까요? 그것은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그런 나를 돌보지도 보살피지도 못하고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얼마나 지치고 힘들고 상처 입었는지 내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그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아주 친한 친구와 만나 차를 마시듯, 주님과 함께하는 둘만의 시간, 나 자신과 갖는 오붓한 친교의 시간을 갖는 것이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내려놓기
이제 실제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 앞에서 안식을 누리기 위해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 놓읍시다. 나를 친구로 대해 주는 그분 앞에서 나의 속마음을 꺼내 놓는 것입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마음속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죠.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나의 이야기를 꺼내 놓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들춰내는 것은 아픔을 동반하기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누구에게 터놓기 힘든 마음속 이야기나 고민거리를 꺼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라면 나를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먼저 들어 주고 공감해 주며 나를 이해할 것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겠죠.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갖고, 가장 소중한 친구처럼, 예수님 앞에서 조심스레 나의 이야기를 꺼내 놓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숨겨 온 마음, 감추거나 꾸민 마음, 주님께 다 털어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게 맡겨진 책임들, 그로부터 오는 부담감, 세상일로 갖게 되는 걱정과 근심거리들, 타인에게서 받은 상처들, 관계에서 오는 부담감, 그 모든 것을 풀어놓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나를 공감하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내가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훨훨 자유롭게 날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하느님 자녀로 살도록 초대된 복된 삶, 행복한 삶을 살도록, 놀라움과 경탄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희망으로 환희에 차 기쁘게 자기 삶을 찾도록, 이웃과 더불어 진정한 친교의 기쁨을 누리며 살도록 말이죠.
하느님께 돌아가는 시간
결국 피정은 나 자신을 찾는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시면서 나의 삶을 멋지게 살라고 하셨는데, 과연 내가 그렇게 살아왔는지 묻습니다. 그동안 나는 누군가의 아내이자 남편, 부모이자 자녀로 살아오면서, 정작 나 자신의 삶을 잊고 지낸 것은 아닌지? ‘어쩌다 어른’, ‘어쩌다 어르신’이 되면서 젊어서 갖고 있던 꿈과 희망, 인생의 계획을 영영 잊은 것은 아닌지?
하느님 자녀로 나의 삶은 어떠했나요? 우리는 세례성사로 주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서, 하느님 자녀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세속 일에 파묻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하느님 자녀로서의 품위, 고귀함을 지키고 살았나요? 하느님 자녀가 지녀야 할 자부심과 자신감과 든든함을 잃은 채, 마치 하느님 아버지께서 안 계신 사람처럼 살아온 것은 아닌지요?
묵상을 위한 말씀으로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참조)를 읽어 봅시다. 이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처럼 우리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자녀이지만, 실제로는 이방인의 세상에서 돼지 치는 일을 하며 다른 이의 관심과 사랑 어린 말 한마디 받지 못하고 살아오지 않았는지 묻고자 합니다. 혹은, 큰아들처럼 자신을 종처럼 여기며 살아오지는 않았나요? 하느님께서는 내가 기쁘고 자유롭기를 바라시는데, 나는 그저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줄로 여긴 것은 아닌지요?
이제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갑시다. 회개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며, 나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다시 발견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분의 가여워하는 마음, 애끓는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눈길을 마주하고, 그 마음과 눈길을 통해 자녀로서의 품위와 고귀함을 되찾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아무 말 없이 우리를 안고 다독여 주시며 “그래, 돌아왔으니 이제 괜찮다.”라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함께 묵상해요! ☺️
1. 침묵 중에 내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괴로움과 상처, 압박감, 피로감, 근심과 염려 등을 느껴 봅시다.
2. 나의 모든 이야기에 귀 기울이시고 공감하시며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는 자상한 아버지를 마주합시다. 그분께 나의 지치고 괴로운 마음, 안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을 보여 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