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삶, 믿음은 절대적 가치

가톨릭 예술

신앙인의 삶, 믿음은 절대적 가치

휴고 심베리와 뭉크의 그림으로 바라본 인간 내면의 불안

2026.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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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줄 요약

 

1. 휴고 심베리와 에드바르트 뭉크는 작품을 통해 인간의 불안과 죽음의 공포를 각각 ‘견뎌 내는 침묵’과 ‘폭발하는 절규’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2. 휴고 심베리의 <상처 입은 천사>는 고통을 끌어안고 침묵 속에서 버텨 내는 존재의 연약함을, 뭉크의 <절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내면의 붕괴를 극단적으로 드러냅니다.

 

3. 이 글을 통해 불안과 죽음을 마주한 신앙인은 믿음을 절대적 가치로 받아들여야 함을 성찰하게 됩니다.

 


 

인간 내면의 숨겨진 두려움

 

아름다운 꽃들과 푸르른 산천으로 둘러싸인 3월의 어느 봄날, 내가 보고 있는 풍경처럼 내 마음도 이토록 평온하고 행복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적인 마음을 가득 담아, 내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잠시 희망해 보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평생을 싸우고 이겨 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 현실은 언제나 두렵고 힘들어 때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떠오른다. 일말의 희망을 품어 보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늘 함께 서 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화가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그 가운데 핀란드에서 가장 사랑받는 대표적인 상징주의 화가 휴고 심베리(Hugo Simberg)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르웨이 표현주의 작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가 있다.

 

 

그들의 대표작, <상처 입은 천사(The Wounded Angel, 1903)><절규(The Scream, 1893)>를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그들은 비슷한 생각을 전혀 다르게 표현했다.

 

그들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상징주의와 표현주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두 사람 다 보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대신, 느껴지는 내면을 그리려는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당시 불안한 유럽의 상황과 연결된 현상으로, 산업과 과학의 급속한 발전에서 비롯되었다. 종교나 신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고, 절대적인 가치가 될 수도 없었다.

 

결국 예술가들은 현실과 맞서거나 정신적인 것에 몰두하게 되었고, 두 화가 역시 인간의 내면이나 느낌을 왜곡, 변형된 모습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진실을 거짓된 아름다움으로 포장하지 않고, 오히려 기괴하고 우울한 모습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상징주의가 은유와 상징을 통해 신비롭고 초월적인 세계관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표현주의는 말 그대로 내면의 느낌을 분출하고 폭발시키고자 했다. 그들은 내면을 격렬하고 불안하며 혼란스럽고 적대적인 방식으로 왜곡하거나 과장하여 표현하였다., 상징을 통해 숨겨서 표현하느냐, 격렬하게 드러내느냐가 핵심적인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침묵 속에서 견디는 고통 | 심베리의 <상처 입은 천사>

 

<상처 입은 천사>

휴고 심베리, 1903, 아테네움 미술관, 헬싱키, 핀란드 

 

심베리의 <상처 입은 천사>는 상반된 해석을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현실 세계와 종교적 상징을 함께 표현했다. 천사가 있기에 종교적 내용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주 그리스도교적 이미지를 독특하게 사용했기에, 비그리스도교적 작품을 다룬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천사는 선한 존재이자 신과의 연결을 상징하는 영적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심베리는 신성한 존재도 다칠 수 있는 존재로,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나 악마조차도 노동자처럼 일하는 존재로 인간의 삶 속에 묘사함으로써 독특한 변화를 준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날 수도 있지만, 그의 관심은 구원보다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인간이 안고 있는 존재’ 자체의 불완전함에 있었다.

 

따라서 그의 그림들에는 보통 고통·죽음·연약함이 자주 나타난다. 이것은 공포나 비극만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살아 있는 증거임을 드러낸다. 심베리는 이 작품에 대해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것을 거부하고, 관객이 스스로 결론을 내릴 것을 제안했다.

 

이 그림의 배경은 핀란드 헬싱키에 위치한 엘라인타르하(Eläintarha) 공원과 퇴욀뢴라흐티(Töölönlahti) 호수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천사와 두 소년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천상의 존재인 천사가 등장하고, 일반적으로 환자를 나르는 것은 힘이 있는 성인들임에도 이 그림에는 소년들이 등장한다. 게다가 천사는 날개가 부러지고 피를 흘리기도 하며, 눈은 붕대로 감겨 있다. 천사의 눈을 가린다는 의미는 주로 시련과 고통의 수용, 순수함의 보호,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 등으로 해석된다.

 

작가가 이 작품에 대해 설명을 거부한 이유는 관람객이 스스로 그 답을 찾도록 요청하기 위함이다. 어떤 관점에서는 천사를 작가의 분신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심베리는 어린 시절부터 오랜 시간 병마와 고독하게 싸워 왔기 때문이다. 천사는 이러한 자신의 병약한 모습이 투영된 상징일 수 있다.

 

실제로 이 그림의 배경에는 당시 여러 자선 기관과 병원이 있었다. 천사가 들것에 실려 가는 방향이 그러한 시설들을 향하고 있다는 점은, 그의 요양병원 투병 경험이 작품에 투영되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또한 그가 눈이나 몸을 다쳐 병원으로 실려 오는 아이들을 보았을 수 있으며, 이러한 기억이 그림의 배경에 반영된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천사는 설강화(雪降花) 한 다발을 손에 꼭 쥐고 있다. 이 꽃은 희망과 위로, 치유를 상징하는 것으로 천사가 곧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암시한다. 소년은 나이에 맞지 않게 검고 어두운 정장을 입고, 천사를 들것에 앉힌 채 옮기고 있다. 앞의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이고, 뒤쪽 아이는 눈썹을 치켜올린 채 관객들을 향해 원망과 불만의 표정을 드러내며 걷고 있다.

 

왜 천사가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었어?”, 혹은 당신들이 천사를 이렇게 만들었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 그림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도 뒤에 있는 아이의 표정이다. 언제나 선하고 세상에 도움을 베푸는 천사가 이렇게 된 것은 바로 당시 현실을 이렇게 만든 이들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다.

 

상처 입은 천사와 아이들의 불안정한 모습을 통해 작가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여 그 시대를 비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년들과 천사는 이러한 내면의 불만과 아픔을 바깥으로 소리쳐 드러내지 않는다. 그 대신 오히려 모든 것을 끌어안은 채 견뎌 내고 있다.

 


 

현대인의 절규하는 내면 | 뭉크의 <절규>

 

<절규>

에드바르트 뭉크, 1893,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오슬로, 노르웨이

 

앞서 상징주의와 표현주의에 대해 살펴본 것처럼, 뭉크의 <절규>내면에 쌓여 온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뭉크에게 세계는 자신을 공격하고, 삼키며, 미치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는 선이 흔들리고 색이 비명을 지르고, 인물이 입을 벌려 소리를 낸다.

 

그러나 <절규>는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존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은 순간을 그려 낸 것이다. 이 그림은 누군가의 초상이나 걸어가는 타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안, 공포, 고독과 같은 감정을 형상화한 것이다. 마치 핏빛으로 요동치는 하늘과 땅도 내면의 감정 그 자체를 드러내는 듯하다.

 

뭉크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해가 지고 하늘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을 때,

나는 자연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절규를 느꼈다.”

 

즉 인물이 소리를 지른다기보다, 자연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경이 인물의 감정을 그대로 반영하듯 뒤틀려 있는 것이다. 색과 형태의 의미를 살펴보면, 붉은 하늘은 피, 죽음, 불안, 광기를 상징한다. 뒤틀린 선은 심리적 혼란과 공포를, 다리의 직선은 혼란 속에서의 차가운 현실을, 멀리 있는 인물들은 자신이 사회로부터 단절과 고립되어 있음을 드러냈다. 이 그림은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개인의 감정을 현실보다 더 강하게 왜곡해 표현했다.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뭉크는 현대인이 느끼는 존재 불안, 소외, 공포를 정확히 드러낸다. 그래서 이 그림의 주인공은 바로 이고, 이건 내 감정인데?”라는 느낌을 준다. 즉 나의 내면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무너지는 순간을 외부 풍경에 투사해 분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는 절규할 수밖에 없고, 그 절규는 개인을 넘어 세상 전체로 확장되어 세상도 절규한다.

 


 

불안한 세상 속, 믿음에 대한 물음에 답하다.

 

두 그림 모두 우리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뉴스 속 전쟁과 갈등, TV 속 수많은 보험 광고들이 바로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 두려움 그리고 죽음에 대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고통이나 아픔을 경험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죽음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가?

 

이 질문의 근원에는 믿음에 대한 물음이 있다. 신앙인으로서 나는 믿음을 내적으로, 또 외적으로 어떻게 드러내고 있을까? 내 속에 담아 놓고 있을까, 아니면 믿음에 대한 기쁨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을까? 혹은 믿음이라는 것이 정말 내 안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믿음에 의한 삶은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것이며,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신앙인은 믿음을 절대적 가치로 받아들여, 그것을 삶의 방향으로 만들어야 한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믿는 이들, 즉 신앙인에게 두려움과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주님께로 나아가는 희망과 기쁨의 과정이자 순간이다.

 

공포와 두려움, 죽음은 언제나 모든 이의 곁에 함께해 왔다. 하지만 그것들은 신앙인들의 믿음 안에서 존재 이유나 가치를 잃게 되기에, 주님과 그분의 영광이 늘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릴 그림은 상처 입은 천사가 아니라 두 날개를 활짝 편 천사의 보살핌, 그리고 기쁨의 찬양으로 가득 찬 모습일 것이다.

 

 

Profile
서울대교구 사제. 교황청립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교회문화유산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이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예술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회 문화유산의 보전과 교회 예술의 진흥을 위해 힘쓰며,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한 교회 예술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주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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