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주님을 만난 이들: 요한 복음 속 이야기> 시리즈의 아티클로 “필립보가 본 것, 필립보가 보지 못한 것”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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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보는 이미 여러 표징을 체험하고도 예수님 앞에서 인간적인 계산을 내놓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신 빵은 물리적인 빵이 아니라 생명의 빵이신 당신 자신입니다.
💡필립보가 놓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세요. |
필립보의 두 번째 등장,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표징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5-7)
이제 필립보가 등장하는 두 번째 장면으로 넘어가 보자. 적은 양의 빵과 물고기로 수천 명에 이르는 많은 군중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 중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유일한 기적(요한 6,1-15; 마태 14,13-21; 마르 6,30-44; 루카 9,10-17)이다.
그동안 필립보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의 첫 표징과(요한 2,1-11),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여덟 해 동안 앓았던 병자를 고치신 표징(요한 5,1-18)을 비롯하여,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수많은 표징들(요한 2,23)을 체험한 상태였다. 물론 왕실 관리의 아들이 살아난 표징(요한 4,43-54)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왕실 관리를 집으로 돌려보내시는 가운데 먼 곳에 떨어진 집에서 아들의 치유가 일어났기에 필립보가 눈앞에서 이 표징을 체험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이처럼 많은 표징들을 체험한 뒤, 오천 명이 먹을 수 있는 빵을 어디에서 사면 좋겠냐는 예수님의 시험에 답을 할 상황이 되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빵의 기적을 다루는 마르코 복음서에서,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예수님께 되묻는다(마르 6,37).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데, 우리나라의 현재 물가를 고려하면 10만 원 정도 되는 금액이다. 결국 이백 데나리온은 약 2천만 원 정도이다. 애초부터 제자들의 인간적인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그래도 이 정도 돈이면 무엇인가 할 수 있겠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는데, 필립보는 더 나아가 이만큼의 돈도 부족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필립보의 모범 답안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사건을 상기해야 했다. 필요한 것은 예수님 한 분뿐이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표면적으로는 빵을 사는 문제에 관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이 질문을 하나의 문학적 아이러니, 곧 역설로 이해할 수도 있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물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4장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긴 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물이 그녀가 생각했던 물리적 물이 아니었음을 살펴보았다(요한 4,7-15). 따라서 지금 이 말씀에도 깊은 속뜻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빵은 물리적인 빵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이는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분명해진다.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4-35)
아래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군중의 청은 실제로 사마리아 여인의 청과 신비롭게 닮아 있다.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요한 6,34)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요한 4,15)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던 물이 물리적인 물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시는 생명의 물이었듯이,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하신 빵에 대한 말씀도 생명의 빵이신 당신 자신을 가리킨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한번 이 질문을 읽어 보자.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그렇다면 저 사람들이 먹을 생명의 빵, 곧 예수님을 우리는 어디에서 살 수 있는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실 때, 제자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해 보자.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마을에 가 있었기에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요한 4,8.27).
필립보에게 요구되는 답은 어쩌면 이와 같았을 것이다.
“예수님, 살 수 없습니다. 저희는 당신으로 충분합니다. 이미 저희는 당신을 가졌습니다.”1)
그러나 필립보는 이미 답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을 보며 그곳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놀랍게도 이는 그의 세 번째 등장 장면과도 이어진다.
필립보의 세 번째 등장, 그리스인들을 예수님께 인도함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요한 12,20-23)
여기에서 언급된 필립보와 안드레아라는 이름이 열두 제자 중 그리스어로 된 몇 안 되는 이름이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당시 파스카 축제에는 유다인뿐만 아니라 유다교에 관심을 가진 이방인들, 곧 그리스인들도 참여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 본문에서 그리스인들은 왜 필립보를 찾아왔을까? 아마도 그가 국경 근처인 벳사이다 출신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벳사이다는 당시 그리스어가 널리 통용되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 지인인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이끌었던 필립보가, 이제 다른 민족인 그리스인까지 예수님께 인도하고 있다. 이는 그의 사도적 역할이 한층 넓어졌음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이방인들을 예수님께 인도한 필립보의 행동은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때가 이르렀음을 선언하시는 계기가 된다(요한 12,21–23). 여기에서 말씀하신 ‘이 때’는 카나의 첫 기적에서 성모님께 말씀하신 그 때일 것이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온 세상 민족들을 예수님께 이끄는 데 마중물이 된 필립보. 비록 예수님의 질문과 그 의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아직 채워져야 할 부분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그의 신앙 역시 성장하는 과정이 드러난다.
이후 필립보는 그리스어가 널리 사용되었던 소아시아 서남부 히에라폴리스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고 전해진다.
*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1) 이 답은 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불편해하며 떠나갈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건네신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67)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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