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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파스카 성야 미사에 참례한 이영제 요셉 신부의 솔직한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신부는 본당 사목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며,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다’는 깨달음 속에서 지금 자신이 머무는 자리에서 부활의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께 간청합니다. |
동기 신부의 본당에서
머리에 재를 얹으며 시작된 사순 시기가 어느덧 생명의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봄꽃처럼 예수님의 부활로 끝을 맺었다. 매년 성삼일과 파스카 성야 예식에 참례하기 위해 선후배와 동료 사제들이 사목하는 본당을 찾았는데, 올해는 오랜 시간 청소년들을 위해 헌신하다 주임으로 본당 사목을 맡게 된 동기 신부의 본당을 찾아갔다.
주님 만찬 성목요일, 발을 닦아 주시는 주님
경건하게 봉헌된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는 신자들의 발을 정성스럽게 닦아 주는 사제들의 모습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시다 병사들에게 잡혀 대사제와 의회로 끌려다니며 신문을 받으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듯, 성체 안에 숨어 계신 예수님을 수난 감실로 모시며 마무리되었다. 그 이후에도 신자들은 주님 곁에 머물며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 십자가 앞에 하나가 되어
주님 수난 성금요일은 빌라도 앞에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온갖 모욕과 고문을 견디며 십자가 죽음으로 지상 사명을 완수하신 예수님을 묵상한다. 주님 수난 예식에서 신자들은 앙상한 뼈가 드러난 채 고개를 떨구고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 앞으로 모여들었다. 십자가 위 주님을 바라보는 신자들은 마치 백인대장이 그러했듯,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 27,54)라고 고백하며 깊은 절로 예를 표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두 손 모아 십자가의 예수님께 인사하는 어린이부터,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조심스레 허리를 숙이시던 할아버지까지, 모두 주님의 고통과 죽음에 하나가 되었다.
귀로 들은 복음 말씀, 은총으로
오랜 연습으로 다져진 성가대의 장엄한 성가는 귀로 들은 복음 말씀과 눈으로 확인한 전례의 상징들을 더욱 풍성하게 하여 신자들을 은총으로 이끌었다.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흘리는 신자들, 간절한 바람으로 전례가 끝난 후에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던 신자들, 사제의 소명 의식을 북돋는 힘은 바로 하느님과 신자 사이를 잇는 이곳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했다. 바로 그 때문에 많은 사제들이 이 생생한 신비가 펼쳐지는 가장 근본적인 자리인 본당에서 사목하기를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것이리라.
마이크를 넘겨받으며, WYD 안내
파스카 성야 미사가 끝날 무렵, 동기 신부는 내가 맡고 있는 세계청년대회의 소임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교우들에게 부활 축하 인사를 부탁한다며 마이크를 넘겼다.
“괜히 온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신자들과 행복하게 기도하는 동기 신부님을 보니 배가 너무 아픕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방해가 될 정도로 본당에 가고 싶네요.”
신자들의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던진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곧바로 세계청년대회의 의미와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였다. 이제 옆구리를 찌르기만 해도 WYD에 대한 안내가 폭포수처럼 입에서 쏟아져 나온다.
WYD 청소년 대표와 두 손을 꼭 잡고
미사가 끝나고 자매님 한 분이 나보다 훨씬 키가 큰 남자아이를 데리고 오시더니 “신부님, 우리 본당 WYD 청소년 대표에요.”라며 자녀를 소개해 주셨다. 왠지 모를 책임감에 그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내년 본당을 찾아올 세계 청년들을 위해 잘 부탁한다고 두 손 꼭 잡고 격려했다.
지하철 안의 묵상
미사 후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나도 본당에서 사목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나마 이런 연약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성삼일 전례를 되새기며 하느님께서 내게 건네시려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문득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질문에 다다랐다. 과연 부활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
이 질문과 함께 문득 일상에서 자주 쓰는 표현 하나가 떠올랐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 이는 누군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거나 성격이 바뀌면 죽음을 암시한다는 경험에서 비롯된 농담이다. 그만큼 사람이 변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이리라. 그럼에도 이 표현에 담긴 중요한 사실은 죽음을 통해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변화’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다
알에서 부화한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나비가 되는 과정은 자신의 옛 모습을 죽이고 새롭게 변화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처럼 부활도 죽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예수님의 부활에 온전히 결합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 죽음이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다.
부활, 바로 지금 이곳에서
하지만 이는 비단 생물학적인 죽음 뒤에 오는 부활만을 뜻하지 않는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사랑하려는 간절한 노력 속에서 변화한다. 이처럼 이전의 삶에서 나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삶을 살고자 노력할 때, ‘변화’하고자 한 걸음 내디딜 때, 그 순간 바로 이곳에서 우리는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빈 무덤을 뚫고 나오라는 초대
왜 이런 말씀이 내게 주어진 것일까? 아마도 지금 세계청년대회를 준비하며 느끼는 온갖 형태의 고통, 두려움, 그리고 막막함과 무력감들에 갇혀 있지 말고, 부활하신 주님처럼 빈 무덤을 뚫고 나오라는 주님의 초대였으리라. 머리로는 무슨 뜻인지 너무나 잘 알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변화에, 이 죽음에 저항하려는 내 모습도 동시에 보인다.
그러기에 오늘 다시 간절히 주님께 기도한다.
주님, 당신 부활의 빛으로 용기를 내어
빛을 향해 걸어갈 수 있도록
주님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 WYD에 대한 다양한 소식은 이영제 신부의 블로그 ‘오다리 신부의 WYD 이야기
(https://blog.naver.com/josephleeyj)’를 통해서도 접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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