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장 존경하는 성인으로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를 꼽는다. 그분은 특별히 거룩하다거나 영웅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분이 아니라는 점에서 가장 인간적이시기 때문이다. 성녀는 그 인간적인 면모로 작고 작은 우리의 처지를 가장 잘 이해해 주실 것만 같다. 또 다른 이유는, 그분은 평범함을 넘어서 가장 비참한 바닥까지 내려갔음에도 결국 이를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극복하셨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 ‘인천교구 청년 희년 순례’ 사전 답사를 위해 이탈리아 토리노를 방문했다. 토리노는 청소년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요한 보스코 성인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이곳에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이사 2,4)라는 말씀의 정신을 따라, 제2차 세계 대전에 군수 공장으로 사용되었던 공장을 어려운 청소년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센터로 개조한 ‘평화의 포대Arsenal of peace’라는 곳이 있다. 내가 이곳을 방문한 당일 저녁에는 안젤리카 무씨Angelica Musy의 강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사연의 주인공인 안젤리카 무씨.
그 비극을 겪은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밝았다.
무씨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무씨는 어느 날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의 습격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냈다. 차마 위로하기조차 망설여지는 끔찍한 불행이다. 하루아침에 모든 자녀를 잃은 욥과 같은 일을 겪은 것이다(욥 1,13-22 참조). 그런데 무씨는 자신과 같은 희생자가 다시 나오질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과 같은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수감자들을 돕는 재단을 설립했다. 더불어 다른 사람들에게 강연의 자리를 빌려 용서의 정신을 전파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 든 의문은 하루아침에 이러한 비극을 마주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느님과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며 자신의 삶을 파괴시킬 수도 있지 않은가. 그분과 같은 운명을 당한 사람이 아니라면, 끝없는 원망과 고립 속에 남은 삶을 소모한다 해도 그 누구도 비판할 수 없다. 하지만 무씨는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어둠이 아닌 예수님을 선택한 마리아 막달레나
삶이 가장 비참한 처지에까지 내려간 이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극한 상황에서도 결국 어둠의 길이 아닌 예수님을 선택한 성인. 그리하여 신비에 감싸여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큰 위안을 주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인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이름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막달라 출신 마리아’라는 뜻이다. 이 막달라 지역은 갈릴레아 호숫가의 서쪽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이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보 중 하나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인물은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크지만, 실제 성경에서 우리가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바는 의외로 많지 않다. 요한 복음에서 그녀가 등장하는 부분만 보아서도 그러하다.
요한 복음에서 그녀는 언제 등장할까? 놀랍게도 그녀의 첫 등장은 요한 복음의 사실상 마지막 부분인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장면이고(19,25), 그 이후에는 혼자서 무덤을 찾아갈 때와(20,1-2)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 나타셨을 때이다(20,11-18). 곧 예수님의 오랜 공생활 부분에서는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 없고, 그분이 돌아가실 때야 우리에게 나타나는 셈이다.
공관 복음에서는 어떠할까? 이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다음은 공관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부분들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마태 27,56)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마르 15,40)
두 장면 모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이를 고통스럽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때이다. 이처럼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밝은 낮 가운데 걸어 다니실 때(요한 11,9-10 참조)에는 나타나지 않고, 어둠의 때, 어둠이 온 땅이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될 때(마르 15,33 참조) 처음 나타난다. 빛과 어둠이라는 두 가지 대비가 선명하게 이루어지는 요한 복음의 특성을 감안할 때, 그녀의 등장이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그녀는 왜 낮 동안, 빛 아래에서 사람들이 걸을 동안, 그 빛 아래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웃고 걸을 동안,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았을까?
우리는 이 힌트를 이미 앞서 살펴본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찾을 수 있다. 요한 복음 속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마리아 여인과 놀랍게도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마리아 여인과 마찬가지로 주님에 관련된 소식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는데, 이 두 경우 모두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자라나는 씨앗이 된다.
“저는 주님을 뵈었습니다.” (요한 20,18)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요한 4,29)
또한 그녀가 예수님에 대한 인식도,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유다 사람’으로 부르다가(요한 4,9) 마지막엔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것처럼(요한 4,29)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더욱 선명하게 변해 간다.*
*선생님 → 라뿌니 → 주님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요한 20,15)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요한 20,16)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요한 20,18)
마리아 막달레나의 과거 역시 더운 한낮에 혼자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편 마태오, 마르코 복음과는 달리, 루카 복음에서의 마리아 막달레나가 처음 등장하는 부분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루카 8,1-3)
이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출신 이외에 우리가 그녀에게 알 수 있는 유일한 정보이다.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내용인데, 이는 마르코복음에서도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마르 16,9-10)
우리는 여기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밝은 한 낮에 사람들과 웃으며 어울리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일곱 마귀는 그녀의 비참했던 상황을 알려 줄 뿐이다.
네 복음서 그 어떤 부분에서도 그녀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받기 전에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전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녀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받았을 당시의 상황도 철저히 가려져 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벽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성령의 완전한 일곱 은사를 생각한다면, 사마리아 여인은 말 그대로 그 정반대의 입장에 놓여 있다. 이로 인해 일곱 마귀가 함께한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 처지였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없다. 그녀는 어쩌다가 이렇게 어두운 처지에 빠지게 되었을까?
이유야 어떻게 되었든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다. 바로 비극적인 사고를 겪은 이, 그로 인해 누구도 연민하지 않는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이일지라도, 그는 예수님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치유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비참한 처지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인지, 아닌지는 여기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목자를 따르는 양 떼처럼 그분을 찾아 나서는 결심이 중요하다.
*다음 화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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