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맛있는 보리밥집이 있다고 해서 본당 자매님들과 경기도 양평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벼 한참 기다려야만 했다. 보리밥집 앞에서 보리의 효능에 대해 다양하게 광고해서 그런지 우리 뒤로도 줄은 계속 이어졌다.
그때 차례를 기다리며 어르신들이 보리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1950~1960년대까지만 해도 먹을 것이 너무 없어, 보리로만 지은 꽁보리밥을 먹었는데, 이제 그것을 먹으려고 멀리까지 찾아오셨단다. 어렸을 적에는 굶는 것이 일상이었고 혹시 흰 쌀 한 줌이라도 넣으면 그나마 부드럽고 먹을만한데 그 쌀 한 줌이 없어 까슬거리는 꽁보리밥을 드실 수밖에 없으셨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하지만 ‘가난’은 예전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가난의 편’을 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은 굶주림, 고통, 상처, 슬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곁에 있다. 최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란과의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그것을 직접 겪고 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학교, 병원 등 군 시설, 민간 시설을 가릴 것 없이 수많은 폭탄을 마구 쏟아붓고 있다. 그 속에서 어린아이들과 그들을 지켜 내기 위해 부모들이 고통받고 있다.
오늘 함께 살펴보고 싶은 그림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의 작품이다. 그중 <만종(L‘Angélus)>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다음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혼돈의 시기에 탄생한 작품
밀레는 노르망디의 그레빌 아그(Greville-Hague)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은 농업 지역이었기에 어린 시절부터 농부들의 삶은 곧 자신의 삶이었다. 가난했지만 가톨릭 사제였던 삼촌의 도움으로 밀레는 라틴어와 근대 문학 작가들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일찍부터 성인전에 감명받아 종교적인 장면의 데생을 즐겨 그렸다고 한다.
시대적으로 프랑스 2제국이 나폴레옹 3세의 1851년 쿠데타와 함께 출현하며 70년 막을 내리기까지 프랑스는 혼돈의 시기였다. 정치·사회적 혼란은 곧 국민들의 삶으로 이어져 혼돈과 고통 그리고 굶주림으로 가득했다. 이 시기에 나타난 일명 ‘바르비종파’는 1830년대에 등장했던 사실주의 혹은 자연주의 화파로 그들은 산업 혁명과 더불어 수차례의 혁명이 있었던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 문화와 사회, 정치적 회화를 거부하고 자연과 농촌으로 눈을 돌려 영감을 얻고자 하였다. ‘바르비종’은 프랑스 파리에서 30마일 정도 떨어진 퐁텐블로숲 근방에 있는 작은 마을의 이름으로 ‘화가들의 마을(Le Villagedes Peintres)’로 불릴 만큼 밀레, 루소 등 80명 이상의 많은 화가들이 살았던 곳이었다.
바르비종파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농부들의 일상을 화폭에 담은 사람이 바로 밀레이다. 그러나 루소를 비롯한 코로, 뒤프레 같은 대부분의 바르비종파 작가들이 날씨에 따라 미묘하게 변화하는 자연에 관심을 두고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면, 밀레는 자연과 어우러져 일상적인 노동에 전념하는 농부나 목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물론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작품에도 농부나 목자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밀레처럼 작품의 중심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러한 점에서 바르비종에서 밀레가 관심을 가졌던 대상은 자연 그 자체보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정치, 사회적 혼란기 속에 그의 그림을 그리 순수하게 평가하는 평론가들과 대중은 드물었다. 각자의 사상과 정치색의 안경으로 그의 그림을 제멋대로 평가하고 해석하여 끼워 맞추기에 정신이 없었다. 혁명을 선동하는 그림이거나 그 반대의 두 갈래로 양분하였으나, 밀레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고 하기도 한다. 그의 대표작 중에서 <만종(L‘Angelus)>, <이삭 줍는 여인들(Des glaneuses)>을 살펴보며 정말로 그가 의도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 알아보자.
하루 일과를 마친 부부가 삼종 기도하는 모습
만종L‘Angélus 1857~1859년, 캔버스에 유채, 66×55.5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프랑스 |
<만종(L‘Angelus)>은 본래 ’삼종 기도(三鐘祈禱)‘를 의미한다. 삼종 기도는 종을 세 번 친다는 말인데, 이 종소리를 듣고 드리는 기도라 해서 삼종 기도라 한다. 이 삼종 기도는 아침, 점심, 저녁에 바치는데,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알려 준 예수의 잉태와 강생의 신비를 기념하기 위하여 바치는 기도이다. 삼종 기도를 바칠 때 한 문장이 끝나고 성모송을 바치는 이유는 이 기도가 그리스도의 탄생과 성모님을 중심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찍이 서양 미술을 접했던 일본인들이 그림의 제목을 ‘만종’으로 바꾸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밀레는 의뢰인이었던 애플턴이 이 그림을 가져가지 않자, 그림에 종교적 요소들을 첨가하였다. 교회 첨탑을 추가하고, 원래 제목이었던 <감자 수확을 위한 기도(Prayer for the Potato Crop)>를 <만종>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 그림은 종교화의 새로운 양식이라고도 칭송받는다. 하루를 마치며 이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시간의 표현이다. 저녁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면 할머니는 한 번도 잊지 않고 일손을 멈추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곤 했다는 밀레의 기억이 화폭으로 남게 된 것이다. 노동에 지친 농부의 삶이 오히려 수북이 쌓인 감자 바구니를 통해 수확의 기쁨과 감사함으로 바뀐다.
화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두 농민 부부이다. 그들의 초라한 행색은 들녘의 웅장함과 아름다운 저녁노을로 인해 감추어진다. 저녁노을은 오히려 지극히 평온하고 조용하지만 두 손을 모은 그들의 신앙심을 배가시킨다. 저 뒤의 조그맣게 보이는 성당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그림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우리나라 대표 화가인 박수근 화백은 12살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장차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이 그림 속에서 하루 일과를 마친 농민 부부가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경외심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마음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그림 속에서 남자와 여자의 표정은 좌절한 듯한 슬픔이 느껴지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림의 중간 상단부는 푸르게 우거졌지만, 이들이 감자를 캐는 하단부는 이미 수확을 마친 듯 풀의 색이 누런빛으로 가득하다. 어쩌면 이들은 다른 이들이 캐고 남은 곳에서 감자를 찾아 헤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일한 대가가 앞에 놓인 감자 한 바구니인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특히 살바도르 달리는 밀레의 <만종>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달리는 이 그림에 담긴 경건한 분위기가 사실은 슬픔에 가깝고, 그림 속 부부가 감자 바구니가 아닌 아이의 시체 앞에서 애도하는 것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배고픔을 참고 씨감자를 심으며 겨울을 보내고 봄을 기다리는 부부의 발밑의 바구니 속 감자는 수확물이 아닌 봄을 위한 씨감자여야 하지만, 원래 원화에는 관이 그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일부 훼손된 <만종>의 그림을 복원하기 위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은 1963년 자외선으로 그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감자 바구니에 X선을 투시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초벌 그림에서 실제로 바구니에 감자가 아니라 어린아이의 시신을 담은 관으로 보이는 물체가 확인된 것이다. 이 X선 이미지만으로는 그 주장을 명확히 입증하기는 어렵지만, 살기가 너무 어려워 먹을 것 하나 없는 겨울을 버티지 못한 아이의 관을 앞에 두고 기도를 바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림이 바뀌게 된 여러 추측 가운데 하나는, 동료들이 사회 비판성이 짙은 그림이기에 밀레에게 충고했고, 감자 바구니로 고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고된 노동 후의 고요한 정적과 농촌의 평화로움 그리고 그들의 신심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이 된 것이다. 밀레는 이 그림을 강한 종교적 신념보다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nostalgia)를 바탕으로 그렸다.
수확이 끝난 밀밭에서 이삭 줍는 여인들
이삭 줍는 여인들(Des glaneuses) 1857년, 유화, 111.8×83.8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프랑스 |
도시 생활에서의 어려움과 환멸은 자연스레 어린 시절 자신이 살아왔던 고향의 모습들에 대한 그림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힘들게 일하면서도 다음 끼니를 걱정하는 농민들의 표정에는 근심이 가득했고, 생활은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꿈속에서부터 그리던 고향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힘들었지만 활기찼고 생기와 기쁨이 가득했다. 모습은 초라했지만 그의 기억 속 옛 고향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는 ‘벗은 여자의 엉덩이와 가슴만 그리는 화가’라는 평가를 받던 밀레의 작품 세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밀레는 1848년 살롱 출품작 <키질하는 사람>으로 시작하여 이듬해 바르비종으로 이사하며 농부들이 겪는 현실에 관심을 집중했다. 노르망디의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밀레에겐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1857년 살롱전 출품작 <이삭 줍는 여인들>이다.
올해는 풍년인지 추수한 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저 멀리 농부들이 마차에 밀을 가득 싣고 있다. 앞의 세 여인은 그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 여인들은 땅 주인에게 허락을 얻었는지 여유롭게 이삭을 줍고 있다. 평소라면 자신들이 이삭을 모두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니면서 허락해 주지 않아 몰래 이삭을 주웠다. 낟알 하나라도 더 주우려 허리를 깊이 구부린다. 오른편 여인은 잠시 허리를 펴 보려 하지만, 허리가 굳어 쭉 펴지지 않는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더욱 성행했던 젊은 남자들의 도시 진출은 농촌 여성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밀레는 그 모습을 농촌 여성들의 위대함이 느껴지도록 영웅의 조각과 같이 얼굴의 세밀한 표정을 대담하게 제거하고 윤곽만 뚜렷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또한 짙고 다양한 색채로 그들이 겪는 노동의 어려움을 반감시키며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고자 하였다. 마치 어떻게든 이삭 하나라도 찾아 먹을 것을 모으려는 힘든 노동이나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아닌 이삭 줍는 여인들을 목가적으로 표현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밀레는 낭만적이고 평화로운 농촌을 아름답게 묘사했다기보다, 당시로서는 깨인 사고를 가지고 그 내용을 화폭에 담은 작가였다. 이삭 줍는 여인들은 자신보다 가족들, 아이들의 끼니를 위해 버려진 이삭이라도 주워야 했던 사람들이고 그러한 여인들을 부각한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원경의 넘치도록 풍요로운 모습과 대비하여 극빈자들, 그중에서도 여인들과 ‘어머니’를 그 주인공으로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존재한다. 바로 농촌의 현실 고발과 함께 ‘어머니’라는 존재의 위대함이 동시에 이 그림 속에 공존하도록 한 것이다.
주님의 삶은 비참해 보였으나 그분의 마음이 아름다우셨듯이
이 그림들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분명히 농민들의 삶을 표현하는데 현실 고발적이라는 이유보다 내적 아름다움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나를 위한 이익보다 고통받는 아이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그들을 돌보아 주고 그들의 편이 되어 주는 것에서 나온다. 주님의 삶은 비참해 보였으나 그분의 마음이 아름다우셨듯이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밀레의 그림에서 우리는 신심이 깊어 보이는 부부와 평온히 이삭을 줍는 여인의 모습보다 가난과 슬픔과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내적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밭 구석까지 모조리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고 남은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그것들을 가난한 이와 이방인을 위하여 남겨 두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 2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