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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것을 ‘클래식’이라고 합니다. 클래식은 단지 오래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그 안에 담긴 아름다움과 진리를 전합니다. 가톨릭 안에서도 그런 고전은 여전히 우리 삶에서 살아 숨 쉬며, 오늘의 신앙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이 남긴 지혜의 기록 또한 오늘날 우리가 다시 읽어야 할 클래식입니다. 그들은 세상 속에서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끊임없이 묻고 답하며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삶의 지혜를 전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들려주는 클래식의 지혜를 함께 되새겨 보려 합니다. |
옛날 사람
며칠 전, 사무실 직원과 ‘껌’을 주제로 담소를 나눴다. 껌 종류가 예전보다 훨씬 다양해지긴 했지만, 껌을 질겅질겅 씹을 때마다 떠오르는 건 “쥬시후레쉬, 후레쉬민트, 스피아민트~”로 시작하는 바로 그 CM송이라며 우리는 서로 ‘옛날 사람’ 인증을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많은 것이 급속도로 변하는 시대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끔 ‘옛날이 좋았지.’ 하며 그 시절을 추억하지 않는가? 이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추억과 회한이 뒤섞이는 감정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변해 버린 세상 속에서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알록달록 화려한 무늬의 패션과 온몸을 뒤흔드는 박진감 넘치는 음악에 매료되다가도, 다시금 ‘고전’에 두 눈과 귀가 집중되는 현상은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신앙생활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궁금함 앞에, 이런 질문을 해 본다.
“옛날 신자랑 지금 신자랑 큰 차이가 있을까?”
문득,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불편한 주제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그건 성공의 척도가 되어 버린 ‘돈’ 뒤에 숨은 우리의 욕망이 아닐까. 이상 속에서 살아 보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땅 위에 서서 세상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이다. ‘부동산’, ‘주식’, ‘코인’이 현대인의 관심사를 지배하는 건 아닌지 질문하게 된다.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 꼭이요!”
마르코 복음 10장 17절~31절에는 ‘하느님 나라’와 ‘부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등장한다. 하느님께 받은 계명의 규율을 모두 지켰다면서 다가온 한 사람, 그는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예수님께 질문한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 이 답을 들은 그 사람은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복음은 전해 준다.
‘돈이 많으면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가?’라는 질문을, 지금 우리 자신에게도 넌지시 던져 보게 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까?
“어떤 이들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주님의 말씀을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되는 대로 듣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정해졌다고 느끼고 스스로 절망합니다. 그런 까닭에 현세에서 모든 면에 순응하며, 자신에게는 현세의 삶만 남아 있다는 확신에서 이 삶에 전적으로 집착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에 이르는 길에서 더욱더 벗어납니다.”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 분도출판사
190~200년 사이에 활동했던 교부(敎父)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저술한 《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에서 위 질문에 대한 답이 보인다. 그렇다. 그 시대의 신자들도 ‘부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곤혹스러웠던 듯하다. 클레멘스에게도 이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였다. 왜냐하면 그의 주 무대가 로마 제국 제2의 도시라 불린 ‘알렉산드리아’였기 때문이다.
옆 동네 이스라엘에서 사도들과 제자들이 찾아왔다. 그들의 열정적 선교는 알렉산드리아에 많은 ‘그리스도인’을 낳았다. 그러나, 이집트와 시리아, 그리스 아테네 등 지중해 바다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땅으로 철학과 무역의 교류가 활발했던 ‘알렉산드리아’는 그야말로 ‘돈이 모이는 동네’였다. 마르코 복음 10장의 말씀은 그야말로 지금껏 누려 왔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중차대한 걸림돌이었다. 철학의 가치를 신뢰했던 클레멘스는, 마르코 복음 10장에 등장하는 문자 너머에 담긴 진짜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을 거스르는 그것은 ‘소유하는 돈’이 아니라, 바로 ‘소유하려는 욕망’이라고.
“제자들 자신도,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두려움과 놀람으로 가득 찼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많은 부를 소유했기 때문입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그물, 낚시 바늘, 고깃배조차 오래전에 버렸습니다. 이것들은 그들이 지닌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두려워하면서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하고 말했습니까? …… 외적 부를 지닌 이들만 아니라 자기 안에 열망을 지니고 있는 사람도 ─제자들도 이 점에서는 부유했으니까요─ 똑같이 하늘에서 쫓겨난다면, 제자들은 충분히 두려움을 느낄 만했습니다.”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 분도출판사
부자여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열망보다 부를 축적하려는 열망이 더 크면 구원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마도 클레멘스는 부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부자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보여 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두려워했듯, 욕망을 지닌 평범한 이들에게 더 불편한 고민거리를 안겨 주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사실은 클레멘스의 진짜 목적은 욕망을 숨기고 싶었던 이들의 진심을 꿰뚫어 보는 것이 아니었을까?
‘과거’가 ‘오늘’에 건네는 용기
결과적으로 “옛날 신자와 지금 신자는 얼마나 다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별다른 차이는 없는 것 같다.”이다. 욕망을 표현하고 실현하는 방식은 분명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그 내면의 진심은 여전히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도 똑 닮았기 때문이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닌 평범한 대다수의 신자에게, 1500년 전 교부(敎父)들의 작품들은 그저 고리타분한 책 한 권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선 작품에서도 봤듯, 모든 교부들의 작품에는 시대의 신앙적 고민의 답을 찾으려는 고군분투의 열매들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조금만 용기를 내어 진득하게 앉아 옛 성현들의 고전 서적들을 펼쳐 보면, 같은 고민을 했던 그들의 위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나온 나의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나온 삶의 궤적을 바라보며, 인생길의 목표를 계속해서 이어 간다.
역사의 저편에 남겨진 ‘고전’이라는 이름이 ‘클래식’이라는 고풍스러움으로 우리에게 다시 찾아와 지금의 신앙을 살아가는 이들의 질문들에 답을 건넨다. 만약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신앙의 길 위에서 주춤거리게 하는 질문거리들이 생긴다면, 교부들의 책 한 권을 용기 내어 집어 보면 어떨는지 소심한 욕심을 부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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