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특집 ② 아무 걱정 마세요

영성과 신심

월간 특집 ② 아무 걱정 마세요

하느님께 응답하며 나아가는 2026년이 되기를 바라며

2026. 0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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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특집 ‘새로고침

 

202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월간 특집 '새로고침'은 익숙해진 신앙의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고,

마음의 방향을 다시 세우는 작은 멈춤의 시간이에요. ⏸️

 

오늘의 글은 지친 일상 속에서 흔들렸던

신앙의 모습을 먼저 고백합니다.🙏

그 고백을 따라가며, 하느님을 향해 다시 마음을 여는

자녀됨의 의미를 천천히 되새겨 보세요.💞

 


 

2025년과 이제 겨우 안면을 튼 것 같은데 벌써 새해가 찾아왔다. 한 해를 시작하며 주체적으로 무언가 새롭게 다짐하는 것은 그 결과를 떠나 참 귀한 일이다. 다짐하기에 앞서 내가 지나온 것, 날 지나쳐 간 것, 내가 쥐고 온 것,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게 되니 말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새해가 왔다고 말하기보다, 우리가 새해에게 간다고 하는 편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이런 것들을 살피다 보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관계적이고 역사적인 일인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와 동시에 내가 관계에서 얼마나 소홀했는지, 그리스도교 신앙이 말하는 인간됨의 본질을 얼마나 자주 잊고 사는지에 대한 반성이 뒤따랐다.

 


 

단절과 인간됨 사이에서

 

지금 나는 로마의 어느 교황청 대학의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부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 공부의 동기이자 목표는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었다. 때론 교회에서 아름다움, 선함, 정의로움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느낄 때도 있으나 그 모든 것들을 상쇄하는, 넘쳐흐르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이를 조금이나마 형용하고 세상 안에서 그분의 좋으심을 찬미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공부하는 삶을 결정했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탈리아산 최상급 올리브유를 발라도 이 정도로 번지르르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문제는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이다. 하느님이 다 무엇이고, 찬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틈도 없이 내일까지 읽어 가야만 하는 책 한 페이지에 갇혀 살고 있다. 언어와 문화적 한계 속에서 나의 모자람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고, 당장 해야 할 일들에 아등바등 매달려 지내다 보니 매사가 피곤하다. 계속되는 피로는 결국 짜증으로 진화하는데, 나의 경우 이 상태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모든 사람을 귀찮고 불필요한 유기체로 규정짓는 것이다. 관계를 단절하고 존재를 지울 수 있다면 참 안락하고 편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나 아무리 일시적이라고 해도, 사람의 존재를 무시하고 관계를 단절하는 패턴을 반복하면 사람을 쉽게 대상화하게 된다. 인간을 기능·효율·편의라는 측면에서 가치를 매기고 평가하는 세상의 논리에 자연스럽게 동조하게 된다.

 

관계의 단절은 당연하게도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로도 이어진다. 바로 여기에서 그리스도교적 인간됨의 본질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스스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가 인간이다. 본질적으로 관계적 구조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이기에 고립된 개별로서가 아닌 다른 이를 향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됨을 앞서 말한 것처럼 단순히 기능적인 선택의 영역으로 전락시켰을 때, 결론적으로 타인과 하느님뿐 아니라 하느님과 관계 안에서 창조된 나 자신의 인간됨 역시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된다. 이런 꼴로 살면서 무엇을 찬미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께서 건네시는 말씀

 

하지만 보물 같은 순간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어김없이 나를 찾아와 하느님께로 발걸음을 돌려놓고는 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2025년 정기 희년의 문이 활짝 열렸을 때,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 전 세계의 순례객이 이 작은 도시 로마를 찾았다. 로마에 사는 평신도 신학생들은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쳐 있기 때문에, 길 위에 모여 선 사람들 틈을 헤치고 지나갈 여력이 없었다. 우리는 농담처럼 저 희년의 문 좀 빨리 닫았으면.” 하고 말했다.

 

그러던 중 대학생 교육 주간(로마교구 대학생들이 모여 학생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소명 의식과 희년의 기쁨을 나누는 행사)이 찾아왔다. 신학원에 사는 학생들의 참여는 의무였다. 나는 이 모든 일이 에너지 소모라고 생각하며 다른 학생들과 함께 라테라노 대성당 앞에 서 있었다. 가장 바쁜 학기 초에 굳이 모여 강의를 듣고, 특별히 긴 미사를 드리고, 다 같이 줄 서서 희년의 문을 통과하는 것이 비효율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어수선함 속에서 담당 인솔자가 우리더러 한쪽에 모이라고 했다. 그리고 부루퉁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희년의 문을 해결해야 할 어떤 문제처럼 통과하려 들지 마세요. 저 열린 문은, 당신을 향해 개방된 하느님의 품입니다. 온전히 나를 안겨 드릴 수 있기를 청하며 하느님 품으로 들어가세요! 하느님을 인정하고 만나세요.”

 

그 순간 하느님과 내 주변에 있던 모든 이를 향해 느낀 미안함과 고마움이 지금도 생생하다. 다른 어떤 날은 미사 때를 놓쳐 아주 작고 낡은 성당에서 저녁 미사를 한 날이었다. 날은 저물었는데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제발 강론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는 불경스러운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이날 미사를 집전하신 할아버지 신부님이 해맑게 웃음을 터뜨리시더니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며 강론을 시작하셨다.

 

정말 웃기는 일이에요. 우리의 모든 것이 얼마나 쓸모없는지, 아마 우리는 상상도 못할 만큼 하느님께 쓸모가 없어요. 그분께서는 완전하고 충만하시며 우리의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분께서 우리의 쓸모없음까지 죽도록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마세요.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쓸모없는 나를 보여 드리고 일상을 살며, 나만큼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이웃을 의식하고 인사하세요. 완전한 하느님께서 불완전한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시는 것처럼…….”

 

다른 존재는 안중에도 두지 않으면서, 자신만을 걱정하고 구하고자 하던 나에게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을 건네시는 것 같았다. 아주 온유하게.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심, 고립되고자 하는 유혹은 항상 힘든 순간에 찾아온다. 그러면 고집스러운 나는 눈과 귀, 마음의 문까지 닫고 있는데, 이런 미숙한 내 수준에 맞춰 하느님께서는 가장 연약한 인간이 되어 나를 찾아오신다.

 

라칭거는 가장 큰 것이 자신을 제한하지 않으면서, 가장 작은 것 안에 머무르는 것, 이것이 신적인 것.”라고 말한다. 가장 크신 분(하느님)께서 가장 작은 한계(인간) 안으로 내려오셨다는 이 역설은, 하느님의 존재 방식이 상징적 겸손도, 자기 완결도 아닌 개방과 관계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하느님께서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우리를 향해 전적으로 당신을 열어 주심으로써 존재의 가장 높은 형태를 계시하셨고, 그 진리가 가장 강력하게 드러난 사건이 우리가 함께 기념한 성탄, 예수님의 강생(육화)이다.

 

하느님께서 이름을 가지고 인간이 되시어 우리의 역사 속으로 오신 이유는 우리 죄를 없애 주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과 더불어 삼위일체의 친교에 참여하고,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다시 다짐을 해 본다. 새롭게 선물받은 2026년의 한 해를 통과하는 데 집중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나를 개방하고, 하느님 사랑에 자녀로서 응답하겠다고. 나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충만한 관계 속에서 '새로고침'의 시간을 잘 보내기를 바라며 새해 인사로 요한 1서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1요한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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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교황청립 그레고리안 대학에 재학 중입니다. 한국에서 체육교육과를 졸업한 뒤 현재는 신학부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취미는 없지만 매일 산책과 운동을 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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