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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히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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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알긴 아는데…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을 실제로 실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혼자 무언가를 아끼는 마음은 가질 수 있어도, 타인과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합니다. 모든 관계에는 필연적으로 ‘상처’라는 장애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실망을 낳고, 실망은 결국 포기로 이어지곤 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 앞에 숨겨진 결정적 한마디
그런데 우리가 이 계명을 실천하며 자주 간과하는 핵심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이 구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우리가 이 구절의 앞을 떼어 놓고 뒤에 있는 결과만 기억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이해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못남과 죄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못 박히고 계실지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그 상처를 기꺼이 받아들이시며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을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곁을 내어 주는 ‘자비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다가 상처받는 것이, 미워하며 사는 것보다 낫다
오늘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1베드 3,17)
이 말씀을 사랑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사랑하다가 상처받는 것이, 미워하며 사는 것보다 낫다.’라는 고백이 됩니다.
미움과 혐오가 당연시되고 갈등을 부추기는 세상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러나 무작정 그렇게 하라고만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힘의 원동력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함께 알려 주십니다.
내 힘만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조차 사랑하기에 벅찹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릴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처럼’ 사랑할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실 만큼, 예수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기억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혼자가 아닌 함께, ‘성령’의 동행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14,16-17)
‘보호자’로 번역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는 본래 ‘도움을 주기 위해 곁으로 불려 온 존재’를 뜻합니다.
참된 사랑은 누군가가 비를 맞고 있을 때 우산을 씌워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기꺼이 곁에서 함께 비를 맞아 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낙담하고 슬퍼하는 우리 곁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사랑할 수 없기에,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켜 나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격려해 주십니다.
사랑에 자꾸 조건이 붙는 이유
요한 사도는 이렇게 단언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1요한 4,18)
사랑에 계산이 들어가고 일방적인 모습이 되는 이유는 상처받을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마음, 또는 자기만족이나 대가를 바라고 하는 선행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에게 기쁨을 주는 것과 그들이 기쁨을 만끽하는 것을 보는 것은 아름답고 즐거운 일이 됩니다. 형제적 사랑의 결과인 이러한 기쁨은 자기 자신만 바라보는 이의 허영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상대방에게 전해져 그 사람 안에서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사랑의 기쁨>, 제4장 혼인의 사랑, 129항)
예수님께 받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며 그 사랑의 범위를 넓혀 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역동적인 사랑의 모습입니다.
오늘, 어떤 ‘사랑’을 그릴 건가요?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거대한 밑그림을 그리실 때 ‘사랑’이라는 물감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초상화는 입술의 고백이나 머릿속의 지식만으로는 절대 완성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을 몸소 실천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는 ‘삶’이라는 빈 도화지가 있습니다. 그 위에 어떤 그림을 그리시겠습니까?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주님의 사랑을 한 점 한 점 옮겨 그려 나가는 소중한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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