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요나 4,9)

성경 이야기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요나 4,9)

요나의 분노, 하느님의 자비, 그리고 아주까리 이야기

2025.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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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분 안에 요나서의 핵심을 함께 살펴봐요!

 

  • 요나는 왜 화가 났을까?
  • 하느님께서는 왜 요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을까?
  • 아주까리가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는?

  


 

여기, 엘리야 예언자처럼 하느님께 죽음을 청하는 이가 또 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싸리나무 아래에 앉아 하느님께 죽기를 간청하였듯이(1열왕 19,4), 요나는 아주까리 그늘에 앉아 주님께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청하고 있습니다(요나 4,3). 그러나 요나는 엘리야와는 다릅니다. 그는 죽기를 바란다는 엘리야의 말을 되뇌지만, 거인 같았던 엘리야 예언자에 비하면 자기 연민에 빠져 몸부림치는 요나의 모습은 가련하기 짝이 없습니다

 


 

구원은 주님의 것입니다.”

 

요나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님께서는 니네베의 죄악을 언급하며 요나에게 그곳에 가서 예언하라고 말씀하십니다(요나 1,1). 하지만 요나는 이 말씀을 피해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배를 탑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강한 폭풍을 일으키시어, 선원들이 큰 공포에 휩싸였고 자기들의 신을 찾아 부르짖습니다. 배에서 잠들었던 요나는 제비뽑기 끝에 바다에 던져지고 큰 물고기에게 삼켜집니다(요나 2,1). 그는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동안 머물렀습니다.

 

요나는 그곳에서 하느님께 긴 기도를 드리며 구원은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요나 2,10). 이 선언은 요나가 하느님 구원의 수단을 깨달았을 때 나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가 하느님께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물고기는 그를 육지에 뱉어 냈습니다(요나 2,11).

 

요나가 풀려난 후, 이야기의 두 번째 부분이 시작됩니다. 요나는 니네베로 가서 사십 일 후에 그 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요나 3,4). 놀랍게도 니네베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을 믿고 금식하며 회개합니다. 심지어 그들의 왕조차 자루옷을 입고, 하느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또한 사람과 짐승에게 자루옷을 입고 큰 소리로 그분께 부르짖으라고 명령합니다(요나 3,5-8).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행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시고 그 도시를 구원하기로 결정하십니다(요나 3,10).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니네베가 구원받는 장면으로 요나서는 해피 엔딩으로 끝날 것 같지만, 이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요나 3,10). 이야기의 결말에서 요나는 매우 언짢아하고 화를 냅니다(요나 4,1).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에 요나는 죽음을 바라는 지경까지 분노합니다. 이때 요나가 드리는 기도는 사실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고백해 온 신앙 공식입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요나 4,2)

 

이는 탈출 34,6에 나타나는 표현으로, 이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반영합니다. 이 공식은 이스라엘의 회개에 대하여 자비와 너그러움으로 응답하시는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탈출 34,6의 신앙 고백은 이스라엘이 큰 죄악으로 더럽혀진 것으로 여겨지는 사건, 즉 호렙산 기슭에서 금송아지를 숭배한 사건 이후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죄악에 직면하여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분의 백성으로서 거부하시고(탈출 32,7), 당신의 계명을 거역하는 이들에게는 죽음으로 벌하시고(탈출 32,25-29), 당신에게 죄지은 자들을 징벌하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탈출 32,33-35). 그러나 모세의 중재로 이미 벌어진 이 죄악의 일을 뒤집는 길이 열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롭고 너그러운 이름을 선포하심으로써 이스라엘에게 내릴 처벌에 대한 마음을 바꾸십니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탈출 34,6-7)

 

탈출기에서 이 공식이 이스라엘에게 전달된 것이라면, 요나서에서는 적어도 암묵적으로는 니네베에게 전달됩니다. 탈출 32-34장의 모세와 요나를 연결해 보면, 요나가 니네베에서 수행한 역할은 탈출기의 금송아지 사건과 관련된 모세의 역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요나가 4,2에서 기도한 이 신앙 고백은, 사실 그가 니네베 앞에서 하느님을 알리고 자비롭고 오래 참으시는 분을 보여 주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니네베를 대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는 요나를 원망과 분노로 이끌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신앙 고백은 오히려 요나의 깊은 짜증과 화를 드러냅니다. 요나는 이 고백이 니네베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주님의 회개를 거부한 요나의 태도는 그가 살기보다 죽기를 더 원하게 만들었습니다(요나 4,3).

 

주님은 요나가 처한 감정적 상황을 반영하는 듯한 질문,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요나 4,4)라고 물으십니다. 수사학적으로 아니오.”라는 답변을 기대하는 이 질문으로, 하느님께서는 요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스스로 성찰하도록 이끌고자 하시는 듯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는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기 위해 성읍 동쪽에 자리를 잡습니다(요나 4,5).

 

하느님께서 지금 약속하신 것을 정말로 행하실 것인가, 아니면 다시 마음을 바꾸어 성읍을 멸망시키실 것인가?’

 

앞서 하느님의 질문에 대답 대신 침묵을 지킨 요나에게, 하느님께서는 그와 소통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이제 말로 하는 대화가 불가능해지자, 하느님께서는 요나에게 행동을 통해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침묵의 담화에서, 하느님께서 자연에 직접 개입하시면서 요나와 계속 소통하신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요나의 머리 위로 아주까리가 자라나 그늘이 생기게 하셨고(요나 4,6), 요나는 이에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 하느님께서는 벌레를 마련하시어 아주까리를 시들게 하셨고, 뒤이어 뜨거운 동풍이 몰아쳤습니다(요나 4,7-8). 이러한 자연적 요소들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창조 세계와 요나의 삶에 대한 주권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다시 한 번 이러한 하느님께 부정적으로 반응합니다. 구원은 주님의 것(요나 2,10)이라고 단언했지만, 요나는 생명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하느님께서 주실 수 있음을 잊은 듯합니다. 시들어버린 아주까리와 뜨거운 동풍 때문에 기절할 정도로 마음이 상한 요나는 또다시 죽기를 간구합니다. 이러한 요나의 부정적인 반응에 하느님께서는 다시 질문하십니다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요나 4,9)

 

그러나 요나는 죽을 때까지 화를 내는 것이 옳다.”고 선언해 버립니다(요나 4,9). 하느님께서는 요나가 스스로 성찰하고 당신의 메시지를 이해하도록 이끌고 싶어 하십니다. 동정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chŭs)는 불행이나 재난이 닥친 대상에 대하여 친절과 도움을 베푸는 긍정적인 태도를 의미합니다. 요나는 자기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은식물을 동정하고(요나 4,10), 하느님께서는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동정하십니다(요나 4,11). , 요나가 시들어버린 아주까리를 동정하듯 하느님께서도 니네베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정하다라는 같은 동사를 사용하여, 하느님께서는 요나에게 아주까리를 자라게 하신 분도, 니네베 사람들과 동물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를 자라게 하신 분도 당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4,2에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의 본성을 안다고 말했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화를 냈던 요나는 이제 자신이 말한 바로 그분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 이야기는 4,11의 하느님의 질문에 요나가 어떤 반응을 하였는지 말하지 않고 마무리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원수에게도 미친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자비를 기뻐할 수 있는가?’

 

요나는 끝까지 화를 냈지만, 우리는 다르게 응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주님만이 아니라 모든 이의 창조주이시고, 사람과 짐승까지 아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자비는 우리의 좁은 마음을 넘어서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참고 문헌

- G.J. Botterweck H. Ringgren (ed.),“חוסchŭs”, TDOTIV,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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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성경 공부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기도 하지만, 내 자신이 누구인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 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가게 합니다. 저에게 성경은 무한히 펼쳐진 우주와 같습니다. 그 안에서 끊임없는 질문을 만나며, 그 모든 답이 하나로 이어지는 신비로운 여정을 떠나는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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